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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헤르만 헤세다. 아무도 신경 쓰지는 않겠지만 단호하게 '가장 좋아하는' 대상을 말한다는 건 말하는 동시에 선택하지 않은 다른 대상들의 얼굴이 마구 떠오르며 혹시 더 좋아하는 대상이 있진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가져다 준다. 정말 아무도 신경 써주지 않겠지만 어쩐지 아주 신중하고 진지해지는 일이다. 하지만 세상에 나와 십 년을 넘긴지 몇 해 되지 않은 때에 <수레바퀴 밑에서>와 <데미안>으로부터 받았던 강렬한 자립 의지, 스물 즈음의 주된 철학적 고민이었던 이성과 감성의 조율을 이해해주는 듯했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그리고 그 이후 접하면서 인생관에 영향을 지속적으로 미쳤던 <황야의 이리>와 <크눌프>의 감동을 생각해보면, 역시 나에게 가장 아름답게 다가오는 작가는 헤르만 헤세다.

톨스토이처럼 사회적 관점에서 이야기하기 보다는 더 내밀한 인간 개개인의 자유와 신념을 이야기했던 헤르만 헤세는 내가 보고 싶은 것들, 내가 알고 싶은 것들에 대해 꽤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게다가 그의 글 곳곳에 스민 자연과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은 내가 점점 바라게 된 이상적인 삶의 모습에 닿아 있었고, 그의 태도들은 내가 나날이 동경하게 된 인간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헤세는 당시 독일 국민 대다수가 열광하던 나치의 정치적 선동 속에서도 세계대전을 반대했을 만큼 평화를 중시했다. 같은 국민들로부터 질타를 받고 자신의 책들이 금서가 되는 풍파를 견디는 동안 그를 견디게 했던 것도 특유의 평화로운 심성과 자연을 이해할 줄 아는 현명함이었던 것 같다.

헤세의 깊이 있는 자연관과 관대한 세계관, 그리고 단호한 예술관이 고스란히 담긴 것이 바로 이 책에 실린 수 십 편의 에세이들이다. 대부분의 생을 정원사로 지내며 세계 곳곳을 두루 여행했던 헤세에게 싱그러운 자연은 삶과 가장 맞닿아 있는 것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책 안에서도 특히 자연에 대한 그의 생각이 아주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가 나무 한 그루에도 얼마나 큰 애정과 존경심을 지니고 있었는지 구절 마다 배어 있다. 이러한 부분들은 헤세의 또다른 열정의 대상이었던 수채화에서도 느낄 수 있다. 생에 단 한 장을 제외하고는 밝고 경쾌한 느낌의 풍경화만을 그리며 한 인간의 진심어린 애정이 어느 곳을 향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유독 심하게 쏟아지던 업무 속에서 유난스럽게 곤혹을 안겨준 주변 사람들에 치이며 하루하루를 견디는 게 힘들었던 요 며칠, 헤세의 성숙한 글과 그림으로 버틸 수 있었다. 아, 고마운 헤세 할아버지. 꿈에라도 한 번 만나 봤으면.

이따금 씨앗을 뿌리고 수확을 할 때면, 한 순간 나의 마음 속에는 땅 위의 모든 피조물 가운데 유독 우리 인간만이 이와 같은 사물의 순환에서 어딘가 제외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생명의 덧없음을 깨닫지 못하고, 오로지 자신을 위한 특별한 것을 소유하려는 욕심이 너무나 이상하게만 여겨진다. (52쪽)

현대인의 대부분은 고향이 없어졌다. 그들은 새로운 장소와 새로운 사람들을 찾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새로운 가치에 자신의 삶을 투영하면서 낯선 것을 고향으로 만들려고 시도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173쪽)

나를 다르게 바꾸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기적이다. 기적을 찾으려는 사람, 그것을 현실로 만들려는 사람, 그 기적이 일어나도록 도우려는 사람에게서 기적은 멀리 달아날 뿐이다. 내가 하는 일은 다만, 팽팽하게 긴장된 수많은 대립들 사이를 오가면서, 만약 기적이 나에게 다가오려고 하는 것 같으면 그것을 맞을 준비를 할 뿐이다. (184쪽)

시간은 흘러간다. 그러나 지혜는 그 자리에 머물면서 형식과 의식을 바꾼다. 그러면서도 늘 같은 사실에 근거한다. 인간이 자연의 섭리 안에 있다는 것, 우주의 리듬 속에 배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200쪽)

모든 사람들은 내면에 무언가를 담고 있다. 누구나 무언가 할 말이 있다. 그러나 그저 침묵하거나 더듬거리지 말고, 말로든 물감으로든, 음으로든 진실하게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30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