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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소설은 깊이가 없다거나 문학적 정수랄까 하는 것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선입견이 있다. 그저 재미만 주면 그만, 철학적 사상 같은 것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어도 되며, 그럴 때에서야 진정 장르소설다운 것 아니냐는 시선이 있다. 전적으로 그렇게 생각해온 것은 아니지만, 나 역시 약간 얕잡아보는 시선이 있었다. 꽤 오래 전에 읽었던 한국작가의 소설 중에는 선망 받던 문창과의 전설적 선배가 무협소설을 쓰며 돈을 많이 벌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동창을 비롯한 문단에서는 그를 집 나간 반항아 정도로 여기며 인정하지 않는다는 상황 설명을 보기도 했다. 인정을 하네 안 하네 할 자격까지는 없지만, 나도 굳이 가르자면 그 문단의 생각이란 것과 비슷한 견해를 갖고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즐겨 읽지 않았을 뿐, SF 영화의 팬으로서 SF 소설은 본래 좋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무언가 내재된 잣대가 장르소설 보다는 문학상을 수상한 대문호의 글을 읽어야 한다고 종용해 왔을 것이다. 이렇게든 저렇게든 애써 싫어하지 않았다고 말하려는 태도를 보면 눈치 챘겠지만, 이번에 읽은 필립 K. 딕의 소설들은 7백 페이지의 두께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재미있다. 물론 팔목에서 느껴지는 두께는 가끔씩 스물 다섯 편의 단편이 언제 끝날 것인지 남은 종이를 들여다보며 가늠해보게 하곤 했지만 말이다. SF 작가들의 책이 모두 재미있을 리야 없지만, 마찬가지로 보통 문학이라고 일컬어지는 소설들 중 재미있는 것을 찾는 일은 좋은 짝을 만나는 일에 버금갈 만큼 쉽지 않다. 소설의 영역을 나누는 것은 특별하게 찾는 분야의 소설이 있는 팬들에게나 의미 있는 일 아닐까.

PKD의 소설은 반 세기 넘도록 큰 인기를 누려왔고, 특히 헐리웃 SF 영화 감독들에게 사랑을 받아왔다. 이 책에 수록된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는 두 번이나 만들어진 <토탈 리콜>의 원작이며, 가장 유명한 장편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의 꿈을 꾸는가?'는 <블레이드 러너>의 모티브가 되었다. <마이너리티 리포트> 또한 PKD의 영향을 받았고, <인셉션>까지도 PKD가 중요한 모티브를 제공해주었단다. 하지만 PKD의 소설들은 그 자체로는 사실 영화로 만들 만큼 탄탄한 이야기 구조나 캐릭터의 개성이 없다. 특히나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은 더욱 심각한 상태일 것이다. 대신에 그의 소설들은 어느 것 하나 빠짐 없이 기발한 발상을 담고 있고, 그래서 다른 이들에게 영감을 주기에 아주 적합해 보인다. 가외로, 그가 60년 대에 주로 쓴 이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이 2014년의 테라(지구)와 외계를 그리고 있다는 점은 2014년을 코앞에 둔 지금 읽을 때 꽤 오묘한 느김을 준다.

라이트풋은 눈을 껌뻑였다. 프눌이 순식간에 4피트 키로 성장했고, 그 동료 역시 순식간에 그를 따라 커졌기 때문이다. 두 마리 모두 이제 예전보다 두 배로 커져있었다. 담배를 피운 덕분에 프눌의 키가 2피트가 더 자란 것이었다. (64쪽, 프눌과의 전쟁)

그는 자신이 이 가상의 세계를 붙들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주변의 세계가 무너져 내리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한 사람은 그 주변의 세계로 구성되어 있다. 세계가 무너지면 그 사람의 존재도 사라지게 된다. (160쪽, 은둔 증후군)

물론 우리가 몰랐던 것은 바로 이거였죠. 믿을 만한 다양한 경험이 혼재한다는 것.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죠. 사람마다 서로 다른 경험을 해야 하는 것은 환상 쪽이고, 진실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해야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난 거죠. (393쪽, 옛 선조들의 믿음)

상황을 생각하면 할수록 그는 울적해지기만 했습니다. 과연 이것이 비참한 삶에서 빠져나가는 길인지, 아니면 그저 방향만 바꾼 새로운 비참함으로 향해 가는 일인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요? (457쪽, 모자란 비버 캐드버리)

"당신을 재울 수가 없습니다." 우주선의 목소리가 케밍스의 머릿속에서 울렸다. "오류가 너무 복합적입니다. 복구할 수도, 수리할 수도 없습니다. 당신은 10년 동안 깨어있게 될 겁니다." (664쪽, 어서 그곳에 도착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