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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름끼치게 디테일하고 어지러울 정도로 방대하다. 귄터 그라스의 이름 난 저작 <양철북>은 노벨상의 오라와 개성 있는 판화가 주는 매력으로 눈 여겨 보던 중, 휴가 때 읽을 요량으로 사 둔 몇 권의 책 중 하나다. 휴가 때 읽을 책으로 손 꼽았던 것은 순전히 어마어마한 분량 때문이었다. 실제로 6백 페이지가 넘는 무거운 이 양장본은 이동 중 읽다간 손목이 남아나지 않을 책이다. 결국 어디로도 떠나지 않고 집에서 온전히 휴식을 취하게 된 휴가 첫 날과 이튿 날에 계획대로 읽게 되었으나, 다소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후회가 든다.

이런 내용인 줄 알았더라면 좀 더 아름다운 이야기를 선택했을 텐데. 느긋한 마음과 편안한 자세로 내리 읽기는 했지만, 내용은 도무지 아름다운 구석을 찾을 수가 없는 불쾌함의 올빼미 파티였다. 주인공 오스카는 세 살 때 스스로 성장을 그만두었다고 말하는 난쟁이 꼽추다. 이 두꺼운 책은 그가 살인 혐의를 받고 감시를 받고 있는 정신병원에서 자신의 탄생 이전부터 서른 살 생일까지의 삶을 5백 장의 '순결한 종이'에 써내려간 자서전이다. 그는 비정상적인 신체 조건과 정신 연령 때문에 어른이나 아이들의 세계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다. 평범하지 못한 시선으로 그가 묘사하는 2차 대전 전후의 주변 사회는 더욱 해괴하고 난잡해 보인다.

숱한 불륜과 기괴한 죽음, 이를 둘러싼 선악의 모호함으로 기본조차 찾아볼 수 없는 도덕적 붕괴가 이어진다. 귄터 그라스의 문장들은 주절주절 쏟아져 나온다. 여기에는 독특한 발상이 셀 수 없이 많고, 여러 번 언급했듯 그 분량이 압도적이다. 그 많은 분량을 쉬지 않고 이어가는 느낌이어서 읽는 이에게 상당한 혼란을 준다. 내가 감각이 무딘 것인지, 애초에 작가가 의도했던 것이 이러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덕분에 이 소설은 옳은 것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끔찍한 시대상으로만 느껴진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두 부정적인 의미로 미쳐 있는 것처럼 보이고 누구 하나 공감은 물론 동정심이 드는 인물이 없다. 그가 이 소설을 통해 그리려 한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내 깜냥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지만 확실히 체계적이라거나 감동적인 곳은 아닌 것 같다. 아직도 머리가 어지럽다.

나는 지금 당장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해 두고자 한다. 나는 태어났을 때 이미 정신 발육이 완성되어 있어서 그저 나중에 그것을 확인할 뿐인 총명한 갓난아기에 속했다. 태아였을 때에는 외부의 영향을 조금도 받지 않고, 오직 자신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며, 양수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으나, 이제는 전구 밑에서 자연스럽게 부모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말에 비판적인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44~45쪽)

나는 폴란드를 북으로 찾는다. 그래서 이렇게 북을 친다. 잃어버렸다, 아직 잃지 않았다, 벌써 또 잃어버렸다, 누구에게 잃어버렸나, 곧 잃어버린다, 이미 잃었다, 폴란드를 잃었다, 모든 것을 잃었다, 아직 폴란드를 잃지 않았다라고. (108쪽)

"우리의 키를 유지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외면적인 성장 없이도 인간다움을 지켜 나가는 것, 그것이 우리의 과제이며 사명입니다!" (175쪽)

오랜 옛날에 결정된 모든 완전한 신들과 비교하면, 이 반신에게는 죽어야 할 운명 말고도 하나의 장점이 있었다. 즉 오스카는 무엇이든지 마음에 드는 것을 읽을 수 있는 반면, 신들은 스스로 검열의 눈을 번쩍이는 것이다. (334쪽)

서른 번째 생일은 모든 생일 중에서도 가장 뚜렷한 생일이 아니겠는가? 3이란 숫자를 내 안에 간직하고, 60을 예감케 하며, 그리고 60을 여분의 것으로 만든다. (62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