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인기를 끌던 MBC 프로그램 <느낌표> 덕에 '정민 선생님'이 익숙한 정민 교수님. 당시 분홍색 표지가 인상적이었던 '한시 이야기'는 대국민 열풍이 불었을 만큼 한시의 매력을 담뿍 채워놓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책에 감동 받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고등학생이 되었던 내게, 한시는 조각조각 분해되고 일률적으로 분석된 시험 문제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 뒤로 정민 선생도 잊혀졌고 다산 선생의 글들은 더욱 먼 것이 되고 말았다. 정민 선생과의 10년 만의 서면 재회가 이루어진 건 반값 도서로 팔리게 된 다산 선생의 글 모음 덕이라는, 어쩐지 씁쓸한 이유 때문이지만, 그래도 덕분에 오랜만에 뿌리를 찾은 느낌이다.

 

 

다산 정약용의 글들을 열 가지 주제에 맞춰 골라 담고, 정민 선생의 해제를 붙인 책이다. 다산의 글을 한 번 더 현대어로 풀어 적어 놓았는데, 다산의 생각을 오늘 날의 삶에 적용하기 좋게 다듬어 둔 것이어서, 옛 선비의 글이 딱딱하고 어렵게 느껴진다면 정민 선생의 글만 읽어도 괜찮을 것 같다. 나는 말랑하게 만진 글보다는 다산이 썼던 본래의 글을 접하고 싶은 마음에 정민 선생의 글은 훑다시피 하며 읽었는데, 예상만큼 지루하지는 않았다. 원문도 함께 실려 있지만, 속성으로 배우고 속성으로 잊어버린 한자어들이 나열된 부분은 내게 큰 의미가 없었다. 자꾸 보면 한심해지는 것 같아서 거의 시선도 주지 않았다.

 

 

옛 사람들의 글은 교과서 밖에서 접한 것으로 다산의 글이 가장 많았던 것 같다. 그래봐야 아마 <목민심서>와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가 전부였을 테지만,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는 다산의 따뜻한 인간적 면모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에 기억에 남는다. 이 책에서도 다산의 아버지로서의 자상함이 잘 드러나 있다. 여기에서는 여러 주제로 엮은 것이다 보니, 다산의 지녔던 다양한 분야에서의 생각을 들여다 볼 수 있다. 두드러지는 것은 공부법과 선비로서의 태도, 인간의 됨됨이에 대한 신념이다. 조선 후기의 총명한 인물이기에 비교적 깨어 있었다고는 해도, 유교적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했던 것 또한 쉽게 마주하게 되기는 한다. 하지만 오늘날에 보아도 인생의 지침으로 삼을 만한 문장이 많아, 시대를 거슬러 두루 읽을 만한 책 같다.

 

 

 

한 차례 배불러 살이 찌고, 한 번 굶어 수척한 것을 일러 천한 짐승이라 한다. 안목이 짧은 사람은 오늘 뜻 같지 않은 일이 있으면 낙담하여 눈물을 줄줄 흘리고, 내일 뜻에 맞는 일이 있게 되면 생글거리며 얼굴을 편다. 일체의 근심과 기쁨, 즐거움과 분노, 사랑과 미움의 감정이 모두 아침저녁으로 변한다. 달관한 사람이 이를 보ㅕㄴ 비웃지 않겠는가? (44쪽)

 

 

사람이 문장을 지님은 초목에 꽃이 피는 것과 같다. 나무 심는 사람은 처음 심을 적에 뿌리를 북돋워 줄기를 안정시킨다. 이윽고 진액이 돌아 가지와 잎이 돋아나, 꽃이 피어난다. 꽃은 갑작스레 얻을 수가 없다. 정성을 쏟아 바른 마음으로 그 뿌리를 북돋우고, 도타운 행실로 몸을 닦아 그 줄기를 안정시킨다. (158쪽)

 

 

고개를 내젓고 눈을 감아버려 사람을 막고 저 홀로 선할 것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군자는 화합하되 한 가지 부류가 되지는 않는다고 했다. 어찌 먼저 경계를 설정해두고 나와 사물을 달리 보게 할 수 있겠는가? (178쪽)

 

 

음식은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것이다. 무릇 귀한 고기나 맛난 생선이라 해도 입에 들어가기만 하면 더러운 물건이 되어버린다. 그리하여 목구멍을 내려가기도 전에 사람들은 더럽다고 침을 뱉는다. (22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