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에 듣는 '황정민의 FM 데이트'에 게스트로 나오는 정재승 교수가 카이스트 개강 때문인지 겨울에나 다시 찾아온다는 멘트를 남겼다. 과학자로서 인문학을 넘나들며 하이브리드 과학을 전파하고 있는 그는, 글만 재미있게 쓸 뿐만 아니라 말씀도 참 다정하게 한다. 카이스트 학생도 아니고 그의 강연이 열리는 곳이 있다고 해도 찾아갈 열정까진 없어서 참 아쉬웠는데 진중권 교수와 함께 <크로스 2>를 펴냈더라. 마침 이 책을 읽던 지난 한 주에는 정재승 교수의 마지막 라디오 생방송이 있었다.

 

 

나는 라디오를 꽤 좋아한다. 케이블의 개념을 몰랐던 어린 시절부터 집에서는 늘 라디오를 켜두고 살았다. TV에 중독된 또래들과 함께 TV 편성표를 줄줄 외는 동시에 지역방송과 클래식방송 같은 변두리 취급 받는 라디오 방송의 편성표까지 외곤 했다. H.O.T.를 좋아하던 초등학교 시절, 그들이 게스트로 나오던 이본의 '볼륨을 높여요'에 몇 차례 사연을 보냈고 급기야 묵었던 사연 중 읽어주지 못했던 사연을 읽어주던 어느 날 전파를 타며 라디오에 한층 더 애착을 갖게 되기도 했다. 나의 라디오 사랑은 고등학교 야간자율학습 시간까지 이어졌고, 밤 10시 이소라가 진행하던 'FM 음악도시'가 박명수의 목소리로 바뀔 즈음 시들해졌다. 그래도 유희열이 있었기에 그야말로 '라디오 천국'에서 지낼 수 있었지만, 그마저도 떠날 때엔 나를 이끌던 감성을 도둑맞은 느낌이었다. 어느 시절 하나를 졸업한 느낌과 비슷한 것 같다. 지금도 매일 아침 황정민의 신나는 방송을 듣고 있기는 하지만 '35사이'까지 들으며 밤잠 설치던 시절과 같은 감성으로 라디오를 듣고 있진 않다. 아마 좋아하던 DJ의 목소리를 속삭이듯 듣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내 상황과 감성이 달라져버렸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내가 '라디오 시절'의 감성을 추억하듯, 지금 누군가는 또 다른 '라디오 시절'을 겪고 있을 테고, 나 역시 오늘의 라디오 방송을 들을 수 있기에 어제의 라디오 방송을 잊지 않을 수 있다. 라디오 이야기를 너무 많이 했지만, 이 글을 지우지 않고 남겨두어도 되겠다 싶은 건, 이 책에서 정재승-진중권 교수가 함께 적어놓은 것들 또한 동네 찜질방 수준의 빠져나오기 힘든 수다들이기 때문이다. 두 교수는 우리 시대의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소재들을 각자의 시선에서 이야기 한다. 정재승 교수는 과학자임에도 평소 그가 말해오던 화법대로, 라디오의 감성적 측면을 포함한, 기술의 따뜻한 면모를 보여준다. 진중권 교수 역시 평소의 화법대로, 시니컬한 독설에 굳이 이 책에서 이럴 필요까지 있나 싶을 정도로 철학 사상을 읊는다.

 

 

나는 정재승 교수의 다정함을 좋아하고 진중권 교수의 표독스러움은 싫어한다. 하지만 진중권 교수를 왈패 느낌을 지울 수 없는 나꼼수 그룹보다 비교적 선호하는데, 진중권 교수는 설득력 있는 논리로 자신의 소신을 견지하기 때문이다. 무리지어 다니는 사람들보다는 고독 씹으며 구석에 비스듬히 앉아 있는 사람에게 마음이 가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진중권 교수를 '미학 오딧세이'로 접하기 시작해서일까 언사가 참 미운데도, 다른 말쟁이들에 비해 신뢰가 가는 것도 사실이다. 가끔은 반항하고 싶어 답답할 때 그를 보며 속이 시원해질 때도 있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현실. 어쨌든 이 책을 읽으며 진중권 교수의 글에서 느껴지는 생각을 엿보며 조금이나마 호감을 더 쌓게 되기도 했다.

 

 

전혀 다른 스타일의 글쓰기를 하는 두 교수님들이지만, 과학과 인문학으로 사회를 읽는 다는 좋은 기획 하에 재밌게 쓰였다. 첫 번째 책, 두 번째 책이 아니라 시즌1, 시즌2로 나뉘는 것도 애초에 한겨레21에 글을 연재하며 시작되었듯, 사회적 흐름에 읽으며 해당 시즌을 읽기 위한 작업을 한다는 취지와 잘 맞는 것 같다. 고현정과 나가수부터 4대강 사업과 아랍의 봄까지 주제는 다양하다. 주관적인 기준에서 말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긴 하지만, 익숙한 주제임에도 낯선 과학적-인문학적 정보도 상당하다. 진중권 교수의 글은 종종 지루할 수 있겠지만 최소한 정재승 교수의 글은 전혀 지루함이 없고, 볼 만한 일러스트까지 풍부하다. 크로스 3를 기다리며, 정재승 교수의 라디오 복귀를 기다리며, 내 시선으로 사회를 읽는 데에도 소홀하지 말아야 하겠다.

 

 

 

라디오를 보고 있노라면 세상의 모든 기술은 제자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수많은 기술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요즘, 결국 살아남는 것은 우리 곁에서 우리 삶을 더욱 인간적이고 풍요롭게 해주는 기술들이다. 기술이 문화가 되는 순간 기술은 우리 삶의 동반자가 된다. 귓속말하는 친구 라디오가 꾸준히 우리 곁에 남아서 '과학의 시대에도 낭만이 있음'을 보여주기를 간절하게 바란다. (111쪽, 정재승)

 

 

학교짱이야 학창 시절에 잠깐 철이 없어 하는 짓이라 치자. 성인이 되어서 이런 동네 양아치 수준의 폭력을 저지르는 것은 개체발생적으로는 발달장애일 것이고, 계통발생적으로는 진화의 순서를 거스르는 종의 퇴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127쪽, 진중권)

 

 

천둥만 쳐도 '하늘이 노했나' 두려워하던 원시시대에서 벗어나 자연현상의 과학적 원리를 밝혀내 더이상 두려운 것이 없어진 과학기술의 시대에 우리가 컨트롤할 수 없는 외계 생명체에 의해 확인할 수 없는 무언가가 아직 지구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불안한 신비감'을 제공한다. 아직 인간은 모르는 것이 많고 과학으로 다 알 수 있다는 주장은 오만하며 우리보다 더 지적인 생명체가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는 '꼬리표'는 우리에게 종교가 주는 겸손함을 선사한다. (174쪽, 정재승)

 

 

트위터 같은 소셜 네트워크 시대에 가치 있는 정보란 '나와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주는 정보'다. 취향과 가치관을 공유한 사람들이 제공하는 정보에 사람들은 훨씬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 (217쪽, 정재승)

 

 

김어준의 '우리 편 철학'은 한편으로 매우 위험하다. 우리 편을 위해서라면 과학적 진실과 논문 부정을 외면할 수 있고, 축구 경기의 룰도 무시할 수 있고, 뇌물 수수나 저급한 비키니 시위도 용서받고 이해받아야 하니까. 김어준의 '우리 편 철학'은 앞으로도 진보 진영 내에서 합리적이거나 이념적인 일파와 계속 각을 세울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272쪽, 정재승)

 

 

홍수를 예방한다 하나 홍수 피해가 줄어들었다는 증거는 없다. 4대강 유역의 홍수 피해는 원래부터 극히 미미했다. 외려 이 사업으로 인한 두부침식으로 도로가 붕괴하고 다리가 무너졌다. 재퇴적으로 막대한 준설비용도 더 들어갈 것으로 치자. 정부는 지천 정비를 위해 새로 20조 원가량의 예산을 요청함으로써 4대강 사업의 실패를 자인했다. (321쪽, 진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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