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나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역사니, 시대의 아픔이니, 그런 것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나 혼자 이야기만으로도 벅찬데 다른 사람 이야기에 귀 기울일 시간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렇기에 처음 이 책을 읽을 때는 난감했다. 한 사람의 이야기에 빠져들라치면 다른 사람이 나오고, 그 사람 이야기에 집중하다 보면 또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뭐 이런 소설이 있나 싶었다. 내가 왜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읽어야 되는지 모르겠다고 불평도 했다. 그러나, 세상을 가득 메운 수많은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결된다. 정민 삼촌과 이길용의 아버지는 마약으로, 내 할아버지와 이길용의 아버지는 입체누드 사진으로, 그리고 나와 정민은 연인으로, 헬무트 베르크와 나의 할아버지는 이차세계대전으로, 그렇게 연결 또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각자의 이야기는 이길용의 삶과 마찬가지로“세차게 밀려오는 새로운 시대의 파도에 본의 아니게 휩쓸린 조개껍질 같은 것이었다.”이길용이 우연히 한기복을 만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나’도 우연히 눈 앞에서 여학생이 죽어가는 것을 본 후 독일 행을 결심하고, 정민 삼촌도 우연히 건물이 폭파되는 것을 목격한 후 인생이 바뀐다. 거슬러 올라가면 이기용의 아버지나 할아버지, ‘나’의 할아버지도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불행을 마주하게 된다는 점에서 각각의 이야기는 여러 개인 동시에 또한 하나이다. 등장하는 인물들 각각의 삶은 그렇게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인해 불행의 늪으로 빠져든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헬무트 베르크도 나도 강시우도, 그 와중에 사랑을 한다. 사랑은 ‘입술이고 라디오고 거대한 책이므로. 사랑을 통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내게 말을 건네므로. 그리고 이 세상 모든 것들이 그 입술을 빌려 하는 말은, 바로 지금 여기가 내가 살아가야 할 세계라는 것이므로. 그리하여 우리는 이 세계의 모든 것들과 아름답게, 이토록 아름답게 연결’된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혼자여도 아무리 외로워도 위로받을 수 있게 된다. ‘나’와 ‘정민’이 그토록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이유도 결국엔 위로받고 싶어서였을 거다. 

그것은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와도 연결이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나의 이야기와 비교해보고, 그렇게 세상과 소통하기 위한 것이 소설이라면 말이다. 내가 지금 서있는 이곳이 어디인지, 내가 가고 있는 길은 어디로 향하는 건지 몰라 불안할 때 나를 안심시키는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다른 사람은 어떤지 보고, 그 사람도 나와 비슷한 삶을 산다고, 결국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만큼, 아니 나보다 더 깊은 상처를 안고도 살아가고 있다고, 삶은 다 고만고만한 거라고 스스로에게 속닥여주면 되지 않을까. 또한 그를 통해 내가 서있는 위치를 확인하고, 세상의 모습을 대강 그려볼 수 있다면 불안한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을 것이다. 

또한 이 책은 말한다. 행복은 그저 ‘서로 닿는 입술의, 그 손길의, 살갗의, 그 몸의 움직임’뿐이라는 것을 안다면 죽음이 필연인 세계에서도 우리는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다고. 인간은 백팔십 번 웃은 뒤에야 겨우 한 번 우는 존재이기 때문에, 수없이 많은 불행을 거치면서도 결국엔 견고한 행복을 발견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강시우도 나도 헬무트베르크도 할아버지도 결국에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그러니 외로워도 울지 말자. 세상을 가득 메운 수많은 별들은 아무리 삼등성이라도 이어짐으로써 의미가 된단다. 나도 당신도 결국은 혼자지만, 서로의 절망과 기쁨을 나눌 수만 있다면, 입술과 라디오를 나눌 수만 있다면 괜찮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