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nald Hayman ;

아, 저 이름 어디서 들었더라?

가물거리는 기억, 그 모가지를 움켜쥐자 생각난다.

뉴저먼시네마를 상징하는 얼굴, 파스빈더의 평전 때문이다.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평전 :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 한나래, 1994. 
로널드 레이먼이 파스빈더의 삶(정체성)과 죽음(예술혼)을 묘하게 엮는다.
마치 교차 편집된 영상의 짜릿한 이미지처럼.
 

원서는?  - [FASSBINDER Film Maker] , Simon & Schuster, 1984.  

옮긴이가 제멋대로 제목을 달았지만, 그럭저럭 알맞게 붙여서 다행스럽다.

파스빈더의 대표작을 알린 셈이니까 : <Angst essen Seele auf>, 1973, 93min.

옮긴이가 좋아하는 시인의 이름과 똑같아 순간 착각에 빠졌던 추억도 새록새록.

한창 ‘영화 읽기’에 몰두하던 시절, 잠시 마음 주었던 시네아스트, R. W. 파스빈더 :

빔 벤더스보다 덜 말쑥하고,

베르너 헤어초크보다 덜 과격하고,

알렉산더 클루게 & 콘라트 볼프보다 덜 지혜롭지만

결코 가벼이 다룰 수 없는 존재, 무서운 아이(enfant terrible).

새로운 물결 속 도이칠란트 영화 세상을 한눈에 보기 위한 입문서는?

Hans Günther Pflaum & Hans Helmut Prinzler -

  [Cinema in the Federal Republic of Germany :

   The New German Film Origins and Present Situation

   With a Section on GDR Cinema] , Inter Nationes, Bonn 1993.

이 책은 동/서도이칠란트 가리지 않고 모두 100명의 감독들을 소개한다. 
더불어 도이칠란트의 전반적인 영화 산업에 대해서도 몇 마디 던진다.

이 책 앞표지에 영화 스틸 3장이 보이는데,

가운데 자리 잡은 영화 스틸 사진이 파스빈더의 또 다른 걸작,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Die Ehe der Maria Braun), 1978, 120min.)이다.

[파스빈더 평전]의 뒷표지에도 이 영화의 다른 스틸 사진이 보이는데,

바로 주인공인 마리아(Hanna Schygulla)가 술에 취해 반쯤 쓰러진 모습이다.  

파스빈더 평전을 꺼낸 건,
파스빈더 때문이 아니라 R. 헤이먼이 쓴 흥미로운 책들 때문이다.

그가 눈길을 준 이들은? - 사드, 브레히트, 사르트르, 카프카 & 니체. 

   *

로널드 헤이먼이 쓴 이 조그만 책, [니체]를 만난 건 우연이다.

솔직히 말하면, 그는 니체 전문가는 아니다.

그런데 한 니체 연구서에 그의 책이 언급되었고,

이미 파스빈더 평전으로 좋은 인상을 받은지라

조금 망설임 끝에 결국 [니체]를 손에 넣고 말았다. 
  
원제? -  [니체 : 니체의 목소리들(Nietzsche : Nietzsche’s Voices)].

책은 꽤 이름난 니체의 글, <미치광이(Der toller Mensch)>로 문을 연다 :

[즐거운 학문(Die fröhliche Wissenschaft)] - 세 번째 책  125.

헤이먼은 니체의 마음 밑바닥에서 울려 퍼지는 여러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25쪽 읽기 :

   불안은 의식을 자신의 직분에 집중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는데,

   도스또옙스끼와 프루스트처럼,

   니체 역시 내적 반성을 외부로 돌리고 자신의 의식을 인간의 마음과

   그 작용을 일반화하는 탐험의 전초 기지로 사용하는 데

   천재적인 기질이 있었다.

(로널드 헤이먼은 희곡작가다운 창작성을 내려놓고,

  자기 스스로 니체가 된 듯 니체 마음 안쪽을 파고든다.)

64쪽 읽기 :

   가면을 써도 더 이상 보호받을 수 없음을 알게 된 후,

   니체는 1873년에 언어를 사용하여 진리를 말하는 일의 불가능성에

   관해 썼던 모든 함의와 대면하기로 결심했다.

  

69쪽 읽기 :

   니체는 가면과 목소리 없이 글을 써 나가면서 스스로 모순에 부딪히고

   감정상의 변화가 눈에 띄게 많은 산문을 생산하는 등 더 큰 위험에 처했다.

(가면(Mask)은 니체의 중요한 무기요 망치이며,

세찬 비를 막아 주는 든든한 우산이기도 하다.

그런데 가면에 금이 간 뒤, 우산을 잃어버린 니체!)

37쪽 읽기 :

    니체는 언어가 우산과 같다고 주장한다.

19쪽 읽기 :

    니체 작품 속의 문장들은 문체와 떼어놓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다.

(헤이먼은 이와 같은 <니체 읽기>의 형국을 날카롭게 파헤친다.

 지리멸렬한 상황 속에서 헤이먼이 찾은 길은?

 자크 데리다 & 헨리 스테이튼.)  

 ---> 괄호 속 말은 내가 떠올린 것

   *

1. Jacques Derrida -

     [Eperons : les styles de Nietzsche] , Flammarion, 1978. 
부끄럽게도 내게 있는 데리다의 유일한 원서가 바로 이 책인데,

 

출간된 지 딱 20년 뒤, 데리다의 짭짤한 이 책이 우리말로 나왔다

 : [에쁘롱 : 니체의 문체들], 동문선, 1998.

재미난 것은 원서와 번역서의 겉표지 그림이 다르다는 것 :

 Gustave Klimt : <Judith> , 1909. (원서)

 Gustave Klimt : <The Virgin> , 1913. (번역서)

아쉬운 것은? -  번역서에 잔뜩 낀 얼룩들, 곧 엉터리 단어들.

한두 개가 아니라 무려 10여 개가 넘을 정도다(거의 도이치 표기).  
글쎄, 옮긴이의 잘못인지 출판사가 정신을 차리지 못함인지 통 모르겠다.

(언젠가 짬이 날 경우 [에쁘롱] 리뷰 게시판에 ‘바로잡기’ 글을 올릴 생각)

헤이먼의 책과 달리 데리다의 [에쁘롱]은 니체 연구서의 단골손님.

헤이먼 책처럼 한 손에 들고 읽기에 그만이다.

그런데 내용은 골머리를 썩게 만들지도 모르니 감히 추천하기도 그렇다.

주의) 한여름에 절대로 [에쁘롱]을 읽지 마세요! 

2. Henry Staten -

     [Nietzsche’s Voice] , Cornell University Press, 1990.

기발한 방식(psychodialectical approach)으로 니체한테 다가서기.

지금 헨리 스테이튼은 유타대학교에서 철학/국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그가 쓴 여러 책들 가운데 다음 책도 우리네 눈길을 사로잡는다 :

[Wittgenstein and Derrida] , University of Nebraska Press, 1984.

 
   *

다시 [니체 : 니체의 목소리들] 속으로...
79쪽 읽기 :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내 의자 뒤에 있는 소름끼치는 형체가 아니라 그것의 목소리다.
    또한 말이 아니라 저 형체의 웅얼거리는, 
    인간의 것이 아닌 음성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다.
    그렇다. 그것이 인간이 하듯 말을 할 수만 있다면 좋겠다."
                                                                     - [1868-69년 유고] 

(로널드 헤이먼이 확 낚아챈 아이디어가 바로 여기에!) 

94~95쪽 읽기 :
   머릿속 목소리들이 만들어 내는 진술을 
   편집자로서 통제하는 일이 불가능하게 되자
   니체는 더 이상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없었다.

(드디어 더 이상 오를 봉우리가 없어지는 걸까?)  

101쪽 읽기 :
   니체의 광기 때문에 그의 철학적 업적이나 
   그가 우리에게 던진 요구 모두가 무효가 되지는 않는다.
   우리가 그를 따라 막다른 골목에 가더라도,
   우리는 그가 한 방식대로 도망칠 수는 없다.

102쪽 읽기 :
   니체가 우리의 모든 관습 뒤에 숨겨진 가정에 도전을 한 후
   한 세기가 넘게 흘렀지만,  우리는 아직 대답도, 다른 규약도 찾아내지 못했다.

(니체는 ’자신의 르네상스’를 맞이하기 위해 적어도 100년이 걸린다고 예언하였다.
 하지만 예언은 빗나간 것일까? 보기 좋게 들어맞은 것일까?
 아직도 니체는 논쟁 한복판에 외로이 서 있다.)

  ---> 괄호 속 말은 내가 떠올린 것 
 
   * 
 

로널드 헤이먼은 니체의 원문을 성실하게 읽고,

게다가 니체의 편지와 유고도 꼼꼼하게 다룬다.

100쪽 남짓한 책에서 글쓰기의 본보기를 자랑하는 듯.

그런데 하찮은 착각이 일어났다.

난 이 조그만 책이 다음 책인 줄 알았던 것 :

[Nietzsche: A Critical Life] , Oxford Univ Press, 1980.

헤이먼의 니체 전기는 바로 옥스퍼드대학교 출판부에서 펴낸 저 책이었던 것.
내가 고른 [니체]는,
묵직한 전기가 아니라 가벼운 입문서인 셈이다.

조그만 책, [니체 : 니체의 목소리들]은 피닉스 출판사가 기획한

철학 시리즈(<The Great Philosophers>) 가운데 한 권이었던 것.

’사람은 착각하는 존재다’, 정말 옳은 말이다.

이 조그만 책은 지난 3월에 나온 책(개마고원, 2009), 

[니체는 왜 민주주의에 반대했는가]완 확연히 다르다.

아마 김진석이 꼬집는 대상에 이 책 또한 들어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니체가 줄곧 내세운 관점주의(Perspektismus)를 생각해 보라.

헤이먼의 책은 너그러이 봐줄 수 있는 아름다운(?) 책이다. 

   *

끝으로, 100미터 책읽기 & 니체 전기,

이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해결하는 길을 안내하면서 마무리를...

[Friedrich Nietzsche]
 mit Selbstzeugnissen und Bilddokumenten dargestellt von Ivo Frenzel ,
 Rowohlt Taschenbuch , 1966.

니체 전기의 교과서로 대접을 받는 책이다. 
150쪽 남짓한 두께에 실린 정보는 만석꾼 부럽지 않을 정도.
하지만 무려 40여 년 전에 나왔던 책인지라 곰팡이 냄새가 좀 난다.
사실 이 책보다 더 알차고 반듯한 니체 전기는 꽤 있지만,
조그만 책을 말하는 바람에 이보 프렌첼이 간택된 것이다.   

앞표지 : 어머니와 니체가 사이좋게 찍은 사진.

뒷표지 : 칼을 찬 채 뚫어져라 앞을 보며 서 있는 니체 사진. 

한창 때 -의도했든 아니든- 정신을 놓은 니체의 앞날 때문일까?

찬찬히 사진을 들여다보면 불안한 듯한 니체의 얼굴이 안쓰럽다. 
겉표지를 감싸는 짙푸른 풀빛이 왠지 모르게 서글피 반짝거린다.
아니나 다를까 이 사진은 1892년에 찍은 것이다.
1889년, 투린(Turin)에서 쓰러진 뒤 거의 3년 만에 카메라 앞에 선 니체.

니체 & 어머니(Franziska) + 니체 & 여동생(Elisabeth Förster-Nietzsche)

 : 최근 니체 연구의 커다란 물줄기다, 무턱대고 저버릴 수 없는. 
이에 관한 빼어난 연구서 한 권 꺼내들고 싶다.
지난해 여름날에 내가 흠뻑 빠져서 읽었던 책을.

Carol Diethe -
 [Nietzsche’s Sister and the Will to Power : 
  A Biography of Elisabeth Förster-Nietzsche] ,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 2003.

앞표지 : 견진성사(堅振聖事)를 받은 15살의 어여쁜 엘리자베트 모습(1861).  
이 책은 고운 꾸밈새 덕분에 그냥 두고 봐도 신나지만,
니체 가족사가 그리 화기애애하지 못한 탓에 마음 아프다.  
지은이 캐럴 디테는 잉글랜드 남동부에 자리 잡은 미들섹스대학교 교수로서 
탁월한 니체 전문가이자  한 니체 재단의 창설자이기도 하다(
<British Friedrich Nietzsche Foundation>).


P.S.

짜장면 한 그릇 먹지 않아도 굶어 죽지 않는다.

그 대신에 짜장면 값으로 이 조그만 책을 사서 읽으시길!

배부른 돼지 & 배고픈 소크라테스 ; 당신은 어느 길로 들어설 것인가?

하기야 배고프면 눈에 뵈는 게 없다.

나도 배고픔을 잘 안다.

아니, 배고픔을 겪어 보았다.

물론 지금도 배고프다.

 

굶주리는 아이들한테 밥 한 그릇 제대로 주지 못하는 대한민국.

이 땅에 민주주의는커녕 弘益人間의 정신도 사라진 지 오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