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에서 프랑스로,

머묾에서 떠돎으로,

말에서 글로

번지는 삶. 

그랬다.

그는 사라졌다,

우주란 감옥 속으로. 

똘똘한 사상은 별처럼 빛나건만

아침놀은 여전히 어둑어둑하다.

당신의 품속에 잠들 땐 언제나.  

   *

IN MEMORIAM

E. M. Cioran

 1911 - 1995

Simone Boue

 1919 - 1997

Ilinca Zarifipol-Johnston

  1952 - 2005

 

 

 *  

이 탁월한 연구서(전기)는 위 세 사람을 기리며 시작한다.  

너저분한 헌사 대신에 그냥 이름 한번 부르며 떠난다. 
기억은 마냥 기다리지 않는다.

이 책의 편집은 일린카의 남편 케네스 R. 존스턴이 도맡았다.

그러니까 이 책은 일린차의 유고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전체 구성 : 1부 + 2부 ( 부록 + 각주 + 참고 문헌 + 색인).
K. R. 존스턴이 1부의 4장 & 8장만 썼을 뿐이고,
그밖의 모든 건 일린카의 기본 구상과 원고를 따랐다.
다시 말해, 이것은 일린카 자리포폴-존스턴의 책이나 마찬가지다. 

루마니아 출신의 일린카는 인디애나대학교 비교문학 교수로서
루마니아어와 프랑스어, 모두 능통하다. 

그런 까닭에 일린카야말로 에밀 시오랑을 탐구할 적임자이다.
그이가 전문적인 철학교수가 아니라서 꺼림칙스럽다고?

다 부질없는 생각이다.

  

에밀 시오랑, 그가 누군가?

뻔한 철학사의 궤도를 당당하게 벗어난 아웃사이더 아닌가?

니체를 쏙 빼닮은 격언,

아니, 니체보다 더 재빠르고, 더 퉁명스러운 글투를 선보인 시오랑!

거장은 언제나 18세기 프랑스 서간체 양식의 ‘창백한 문체’를 닮고자 했다.  

 

그렇다면 문학교수가 시오랑을 헤아리는 데 더 알맞을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1부 제목은 <루마니아에서 보낸 에밀 시오랑의 삶>이다.

반드시 루마니아어가 요청되는 길이다.

일린카의 모국어가 루마니아어일진대 무슨 문제가 있으랴. 

2005년, 일린카는 책을 끝까지 마무리 짓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K. R. 존스턴에 따르면, 일린카는 누구나 알기 쉬운 전기를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결코 글이 만만치 않다.
금반 글 사이에 촘촘히 박힌 일린차의 명민함을 알아채고 말 것이다.

시오랑은 단짝(Simone Boue)과 함께 허름한 6층 다락방에서 살았는데,
일린카는 거기서 시오랑을 직접 만나 얘기하고, 함께 산책하기도 했다.
그럼으로써 일린카는 시오랑 마음읽기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만큼 일린카는 누구 못지않게 시오랑의 말년을 꼼꼼하게 지켜본 사람이다.

 

그야말로 일린카는 20세기를 대표할 만한 위대한 사상가,  

시오랑의 마지막 몇 해를 함께 보낸 산증인이 아니겠는가.

세상을 마음껏 놀리고, 부수고, 가로지른 사상가인 에밀 시오랑. 
아직도 우리한테 거장의 얼굴이 낯설다 함은 부끄러운 일이다. 

*

나는 일린카를 지난 잔인한 4월에 처음 알게 됐다.

시오랑의 싱그러운 초록빛 감도는 책을 통해서다 :

  [Lacrimi şi sfinţi,], Bucuresti, 1937.

물론 원서가 아니라 잉글리시 번역본으로 읽었다 :

[Tears and Saints],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8.

 

시오랑은 이 책 덕분에 병치레(?)를 톡톡히 치렀다.

빼어난 종교사학자인 미르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 1907~1986)는 

이 책을 두고 ‘혼돈과 무질서로 뒤범벅이 된 글’이라고 싸잡아 욕했다.

게다가 루마니아 정교회로부턴 ‘신성모독으로 얼룩진 책’이란 비난까지 들었다.

여기서 잠깐 :  에밀 시오랑의 아버지는? - 루마니아 정교회 사제!

왜 에밀 시오랑이 루마니아를 저버리고, 프랑스를 고른 것일까?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간단한 답은 이미 나온 셈이다.

예서 굳이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 1632~1677)까지 들먹일 필요는 없으리라.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난 이 책,

‘되바라진, 너무나 되바라진’ 책([Tears and Saints])을 무지 사랑한다.

특히 겉표지가 사람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드는데,

그 까닭은 바로 그림(전체가 아닌 부분) 때문이다.

화가는?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Rogier van der Weyden, 1399/1400~ 1464).

북유럽 르네상스 회화를 상징하는 거장의 그림은 ?  

                   <The Deposition>

          220 x 260, Oil on oak panel , 1460

             Museo del Prado, Madrid

 
   *   

[Tears and Saints]  :
- Becoming is nothing more than a cosmic sigh. 
   We are the wounds of nature, and God is doubting Thomas. (46쪽)  

- Music is everything.

   God himself is nothing more than an acoustic hallucination. (54쪽)
- Let God pray for the man in whom there is nothing left to die!  (118쪽)

   *

에밀 시오랑은 23살 때 자신의 첫 작품을 내놓았다 :

[Pe culmile disperării], Bucureşti , 1934.

이 처녀작은 우리말로 이미 나와 있다 : [절망의 맨끝에서], 에디터, 1994.

그런데 안타깝게도 옮긴이가 번역에 쓴 대본을 밝히지 않았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는 일이다.  

너무도 잘못된 경우다. 

 

일린카는 이 책 또한 부지런히 루마니아어에서 잉글리시로 곧바로 옮겼다 :
[On the Heights of Despair],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6.

 
   *

앞으로 이만한 연구서를 또 만날 수 있을까?  

만약 일린카가 오래 살았더라면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시오랑을 껴안을 수 있었을 텐데...

아, 참으로 가혹한 운명의 수레바퀴여!

 
   * 

인디애나대학교 출판부에서 나온 이 책은 꾸밈새가 단아하기 그지없다.

겉표지를 벗기면 옅은 쑥색의 하드커버가 보이는데,

이 위에 짙은 쑥색으로 CIORAN을 새긴 글씨가 또렷하다.

 

겉표지에 나온 시오랑의 젊은 시절 사진,

목탄화를 그리고 있는 시오랑의 모습은 
시오랑 가족의 허락 아래 책에 담은 것이다.

음, 앞뒤를 절묘하게 맞추고자 함인가?

뒷표지 안쪽에 실린 일린카의 소묘(drawing by Nick Bashall)가 눈길을 끈다

 : 팔짱을 낀 채 서 있는 일린카의 상체 모습.

덤으로 실린 값진 사진(모두 10장) 덕분에 책의 무게는 한결 더 무겁다.

특히 사진9 (156쪽)의 이미지가 책에서 눈을 뗀 뒤에도 줄곧 아른거린다 : 

웃음꽃이 피어난 일린카 & 다소곳한 기운을 전하는 에밀 시오랑(이중주 사진).

젊은 시오랑을 내세운 겉표지와 묘한 대비를 이룬 이 사진의 쓸쓸함이 오묘하다. 

기억은 자꾸만 내뺀다.
정녕 기억은 기다리지 않는다.

일린카는 루마니아로 되돌아가 시오랑(의 삶)을 끄집어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잃어버린 자기 자신의 흔적을 더듬은 것이다.
곧 이 책은 시오랑의 전기인 동시에 자기를 비춘 거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