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라는 어휘는 다의어이며, 의학용어로까지 사용되는 줄 몰랐다. 해리는 제목이자 등장인물이고 해시태그이다. 표지를 넘기니 ‘하늘의 그물’, ‘원죄’, ‘전적으로 당신의 사정일 뿐’, 성경 창세기가 나오는 것을 보니, 단단한 각오를 하고 읽어야겠다는 생각부터 든다. 그런데 막상 보니 우리 사회에서 어렵지 않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막장 드라마를 하도 많이 봐서 심드렁해졌는지 모른다. 그래도 처음부터 겁을 너무 주고 있다. 신부의 타락과 허위도 문제 심각성을 배가시키기 위한 충격요법을 의도하는 것 같다. 문제의식은 심각해 보이지만 직설적이다. 무거움에 읽는 자는 체할 수도 있겠다. 문체는 건조해서 빠르다.

공간적 배경은 안개가 아주 흔한 무진이다. 안개는 단순히 자연현상뿐만 아니라 앞이 잘 안 보이는 것처럼 인간성과 진실이 혼돈을 이루는 공간의 암시이다. 중세 유럽(p137)이나 드라마 속에서나 있을 법한 개막장을 SNS와 세치 혀의 허위로 덮는다. 거짓말쟁이들은 아홉 가지의 참에 한 개의 거짓을 얹어 그 마지막 거짓을 앞의 아홉 개의 참과 같이 보이게 한다(Ⅱ. 158). 거짓과 참이 얼버무려진 상황은 가증스러움이 대폭발이다.

인간의 이중성에 관한 얘기다. 10년 전의 도가니는 특수학교라는 한정된 시설의 교장이 무진의 기득권 세력의 그것이지만, 이번엔 신부 백진우, 이해리처럼 진보를 가장하는 사기 꾼까지로 외연이 넓어졌다. 덩굴(p120)이 계속 줄기를 쳤다. 세상은 정글로 변하고 지성은 사라지고 거대 악은 작은 악의 보호막이 된다(p230). 또한 심각한 것은 악에 침묵하는 언론과 자신들이 원하는 것만을 믿는 민중이다. 그들의 믿음은 눈앞에 있지만 진실은 그 너머에 있다. 성적권력과 살인은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 곁가지다. 교회, 절 어느 종교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야만이지만, 아마 신부는 되기도 어려우며 결혼도 안 해서 가장 깨끗한 이미지를 가진 종교인이기에 등장시켰을 뿐인 것으로 보인다. 가톨릭은 잔가지에 불과하다.

인간의 이중성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남녀노소, 재산의 유무와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으며, 어찌 보면 인간에게는 자연스러운 특성일 수도 있고 때로는 유익한 경우도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보호할 가치가 있는 선을 넘는 경우이다. 끊임없이 거짓말로 자신의 비리를 숨기고 사회를 분란의 수준에 이르는 경우에는 자유로운 영역에 둘 수 없다. 이것은 진보냐 보수냐의 정치영역의 문제가 아니고 도덕성을 넘어서 공동체 존망의 문제이며 법의 영역이다. 두려운 것은 해악적인 이중성을 진실의 영역으로 끄집어내는데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진실의 빛을 쪼여,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을 보려는 민중에게 증명해야 한다. 그 이후는 천지분간이 명확해진다. 그래도 불법으로 불법을 드러내선 안 된다. 적법하고 신 앞에서나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방법이어야 한다. 안 그러면 우리도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된 사람들처럼(Ⅱ. p62) 알게 모르게 동화되어 일상이 될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네가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심연도 네 안으로 들어가 너를 들여다본다.’고 했다. 그렇다고 신에게 의존하는 ‘기도’만으로는 실질적인 방법이 되지 못한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양심이 아니라고 했다. ‘상식’이 아닌 의심하고 고발하고 동네방네 소리 질러 많은 사람이 알게 해야 한다. 명예 훼손(p232)이라는 반격과 이슈에는 이슈라는 방해도 이겨낼 줄 알아야 한다.

해악적인 이중성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최근에 최고 권력자였던 자가 10년 동안의 거짓말이 들통났다. 조선 효종 때의 하멜 표류기에서는 조선인은 남을 속여 넘기면 그걸 부끄럽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아주 잘한 일로 여긴다고 적고 있다. 우리에게 이중성의 문제는 아주 오래 뿌리내린 일종의 하위문화로 보일 정도다. 문화는 ‘집단 지성’이 요구되며 변하기가 쉽지 않다. 해리나 신부 한 명을 단죄했다고 해서 당장 해결되는 게 아니다. 또 다른 해리가 모습을 바꿔 그 자리에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一喜一悲하지 말며,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싸워야 하는 문제이다. 누군가는 앞장서야 한다. 당당한 그녀가 바로 첨병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녀가 다루는 세상은 10년 전과는 다르다. 세상은 느리지만 변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지루하고 지나긴 싸움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도 가는 그녀에게 선플을 달아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