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바람이었고 나는 그녀가 흔들고 간 가지였다.  나는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혼자 흔들리며 몸을 떨었다.  만약 나라는 가지에서 꽃이 핀다면 그것은 그녀가 피운 꽃이고,  열매가 열린다면 그 또한 그녀가 열리게 한 것일 터이다.
페이지 : 에필로그 261

책 장을 덮고서도 가슴이 먹먹하다. 
순간 순간 전율한듯 몸을 떤적도 있고,  드러내지 못한 사람에 대한 애틋한 사랑에 한쪽 가슴이 시린적도 있다. 

짬짬히 읽느라 조바심도 컸고,  퇴근길 사무실에 두고온 책에 대한 미련으로 반넘어 온 길을 되짚어 갈까 말까 망설이기도 했다. 
그만큼 이 책을 읽는 내내 바람의 화원에 동화되어 있었나 보다. 

이 글은 소설이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을 책머리에 일러두고 있다.
수록된 그림만으로도 신윤복과 김홍도가 당대의 천재 화원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데,  궁중화원으로 당대에 이름을 떨친 김홍도에 비에 ’속된 그림을 그려 도화서에서 쫓겨났다’는  후문과,  
신윤복. 자 입보, 호 혜원, 고령인, 부친은 첨사 신한평, 벼슬은 첨사다.  풍속화를 잘 그렸다.  부친 신한평은 화원이었다. 
두줄의 기록만으로 살아 숨쉬듯,  실존했던 인물들 속으로 끌어 들이는 작가의 역량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바람의 화원은 김홍도와, 신윤복의 전시회다.
내방에 앉아, 간송박물관과, 국립중앙박물관과, 호암미술관을 두루 다니며 두사람의 그림을 해박한 큐레이트의 그림설명을 덧붙여 감상한 듯하다. 
소설의 줄거리와 한폭, 한폭의 그림에 대한 감식을 어쩌면 이렇게 절묘하게 연결시켰을까.
김홍도와, 신윤복의 삶이 극적으로 달랐듯이 정조의 명에 따라 동제각화라는 그림대결을 통해 그들의 화풍이 극명한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예술은 머릿속에도, 서안 위에도, 도화서의 낡은 양식에도 있지 않다.  거리의 물 긷는 아낙의 미소에,  봇짐을 진 장사치의 어깨 위에 있다.  그러니 너희는 거리의 화원이 되어야 할 것이다." 라고 하는 당대의 임금이 있었기에 그들의 천재성은 겉으로 드러난것이 아닐까.  

내가 소름이 오소소 돋았던 부분은 얼굴없는 그림을 추적하다. 윤복이 신한평의 아들이 아니라 친구 서징이 아비임을 알고, 서징이 남긴 얼굴없는 그림속에 숨겨둔 수수께끼를 밝혀내는 과정이다. 
이 단락에서도 작가의 종이에 대한 공부가 만만찮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여러겹으로 된 종이를 한장씩 들쳐올릴때 마다  아비를 죽인 자의 중치막그림, 턱선과 입, 코의 그림, 이마의 흉터가 드러나는 부분은 긴장감에 숨을 숙이며 보았다. 
그리고, 말 못하는 벙어리 화원에게서 마지막 단서인 간악한 눈빛을 찾았을때 윤복의 분노와 그동안의 억울함에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달빛 어둑한 삼경 (月沈沈夜三更 )
두 사람 마음은 두 사람만 알겠지 ( 雨人心事雨人知 )

윤복의 그림속 화제를 보고 끝내 윤복의 비밀을 알아낸 김홍도의 고백에 나도 심장이 툭 떨어진다.
"얼마나 많은 세월을 내가 죄지으며 살아야 하겠느냐.  너를 마음에 담은 그날부터 나의 삶은 죄 많은 삶이었다. 
너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죄인이었고,  너를 바라볼 때마다 나는 짐승같은 놈이 되어야 했다.  왜 나의 꿈속에 까지 찾아온 것이냐?  왜 나의 머릿속에서 떠나가지 않은 것이냐?"

여자가 도화서 화원이 된다는것도, 여자가 그림을 그리는 것도 상상할 수 밖에 없는 윤복이 붓이 들기위해 여자가 아닌 남자여야 했던 안타까움이 절절히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윤복의 안타까움은 책의 끝머리에 미인도를 통해서 말하고 있다.
" 평생을 감추며 살아왔지만 단 한순간도 포기하지 않았던 바로 저 자신의 모습입니다.  저는 평생을 이 여인과 사랑했으며 앞으로도 여인된 저를 사랑하며 살 것입니다."

작가의 상상력으로 그려낸 신윤복의 바람을 닮은 숨결과, 향기와 혼을 눈감아 떠올리는 김홍도의 독백을 따라 나도 이 책을 읽는 내내 화원 신윤복을 사랑했다.

 

 

바람의화원, 김홍도, 신윤복, 이정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