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 보이지 않는 기차길과 듣기만 해도 뭉클한 아버지란 단어에서 가슴 한 켠에 묵직한 돌덩이 하나 얹은 느낌이었다. 이재익 작가는 최고의 청취율을 자랑하는 2시 컬투쇼 담당 PD이자 작가로 왕성한 활동을 하시는 분으로 발간하는 책마다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데 이번 작품은 웬지 무거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역시나 2005년도에 특집으로 방송되었던 [노르망디 코리안]을 보고 집필을 계획했으며 4년에 걸친 자료수집과 취재 과정을 통해 가슴 아픈 우리 역사 속에서 한 아이의 아버지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한 남자의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그려냈다.

 

이야기의 시작은 추석 특집 프로그램으로 죽음을 앞 둔 탈북 노인의 기구한 사연을 방송하기 위해 찾아갔던 '나'는 할아버지로부터 사진 한 장과 그 사진에 얽힌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된다. 기아에서 살아남기 위해 삼대가 탈북을 했지만 할아버지만 살아남았고, 그나마 암으로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할아버지 보다 더 기막힌 삶을 살게 된 할아버지의 아버지 이야기를 듣게 된다. 바로 인터넷에서 떠돌던 사진 속 주인공 [노르망디 코리안]이 바로 할아버지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대장간에서 일하는 길수는 근근히 살아가는 힘겨운 하루하루지만 사랑하는 아들 건우가 있기에 마음은 행복하다. 건우의 여덟살 생일날 건우가 소원하던 피리를 만들어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조선인이면서 일제 앞잡이 역할을 하던 스키타에게 붙잡혀 강제 징집되고 만다. 사랑하는 아들 건우에게 꼭 돌아올테니 건강하게 살고 있어야 한다는 말을 인편에 전하고 신의주를 떠날 수 밖에 없었던 길수의 운명은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살벌한 하루하루를 살게 된다.

 

일본군으로 소련군과 맞써 싸우다 포로로 잡혀 소련군에 넘겨지고, 소련군으로 독일과 싸우다 또 다시 포로로 잡히고 만다. 자신은 조선인이며 강제 징집되어 여기까지 오게 되었으니 조선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애원하고 외쳐 봤지만 모두 소용없었다. 오히려 스탈린의 탐욕에 의해 또 다시 독일군으로 프랑스 노르망디 작전에 참전하게 되고 그곳에서 연합군의 포로로 잡히게 된다. 연합군 장교는 동양인 길수의 그동안의 여정을 듣고 놀라면서도 길수를 미국으로 이송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다 읽고 나서도 먹먹한 마음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몰라 한동안 멍하게 있었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치욕스럽고 아픔이 많았던 일제강점기 시절 이야기야 수도 없이 듣고 보았지만 이 책은 유난히 더 마음을 아프게 한다. 한 마디 말도 건네지 못하고 생이별을 해야만 하는 아버지의 애끓는 마음과 나라를 위해 자식을 두고 독립군 운동을 할 수 밖에 없는 건우엄마 월화, 주권을 빼앗긴 것도 억울한데 일본의 성노리개로 끌려올 수 밖에 없었던 가여운 명선아씨, 형을 대신해 어린나이에 징집된 영수 등 등장인물의 삶은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독자의 마음을 울리고 만다. 그동안 읽었던 이재익 작가의 책 중 가장 감동적이면서 고통스러운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