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부터 1598년에 이르는 2차례의 조일전쟁을 떠 올리기만 하면 무능과 무책임, 이기심, 탐욕스런 권력욕이외에는 어떠한 심성도 갖추지 못한 임금과 이 못지않은 사대부들의 작태 때문에 도리질을 치게 만드는 울화가 치민다. 결국 이네들을 말하는 역사의 반복적인 진부한 서술은 오늘 그 어떠한 교훈도 말하지 못할 뿐 아니라, 반면교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지도 않는다. 

만약 이 작품이 이러한 지배계층에 초점을 맞추어 다시금 반복적인 수사만을 늘어놓았다면 아예 책장을 덮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다행스럽게도 서자(庶子), 의병, 밀정(密偵)과 같이 권력자를 살짝 피한 인물들, 그리고 삼포에 포진한 왜성(倭城)을 기반으로 한 당대의 실상에 밀착하고 있어 역사의 표면에 떠오르지 않던 사람들과 사회를 조명하고 있다는 참신함이 있다.

특히, 비변사의 비밀 낭청(郎廳), 일종의 비밀 첩보원이 서사의 중심에 서 있고, 무대를 16세기 말 조선반도는 물론 일본 열도까지 확장하여 그 스케일의 사실성은 물론 우리 문학에서는 낯설기만 한 닌자(忍者)의 등장까지 더해 전혀 새로운 감상을 갖게 하는 것은 이 소설의 매력이라 할 수 있겠다.
소설은 세칭‘정유재란’이라 일컬어지는 2차 조일전쟁이 발발하기 전의 전쟁 휴지기에 양측의 부산한 전쟁 첩보활동을 근간으로 하여, 명일간의 강화회의의 주도권 장악을 위해 조선의 주요인사 암살을 목적으로 잠입한 간자(間者)의 추적이라는 서스펜스를 기조로 하고 있어 역사물 이상의 긴장감과 흥미를 제공하고 있다.

일선 관청을 비롯한 사회동향의 정보를 상신하는 종4품 선전관이라는 공개적 직함 외에 비밀 낭청으로서 적의 첩보활동을 하는 장호준’이라는 인물을 따라가다 보면 ‘로버트 해리스’와 같은 걸출한 팩션물이나 ‘제프리 디버’류의 액션스릴러물의 주인공을 상기시킬 정도로 시대와 상황에 녹아든 비범한 활약에 매혹되게 된다. 여기에 어디에도 예속되지 않고 인간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려고 애써온 자유로운 존재자로서의 닌자에 대한 해석과 아울러 장호준의 대적자로서의‘요미’라는 닌자와의 쫓고 쫓기는 두뇌 싸움은 어지간한 현대의 수사스릴러를 능가한다.

천재적인 변신술로 도깨비, 귀신으로 불리는 요인 암살의 밀명을 지닌 닌자의 기민하고 치밀한 침투와 암살행위, 당대의 긴박하고 아슬아슬한 피아(彼我)간 밀정(密偵)들의 정탐행위의 묘사가 가히 탁월하게 문장을 수놓는다. 급기야 전쟁 종결자라 할 수 있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최후의 타겟이라는 정보가 밝혀지고 장호준과 요미의 숨 막히는 대결은 이야기를 극한으로 몰아넣는다. 게다가 현대 액션스릴러 작품의 꽃이라 할 수 있는‘반전’의 논리적 타당성과 그 당혹스러움의 폭은 압도적이다! 할 만큼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할 정도이다. 

한편, 장호준의 비변사 비밀 낭청으로서의 제수 장면에서 잠깐 등장하는 유성룡이 이미 당대에 전쟁첩보 기능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나, 격의 없는 민의의 수렴을 통한 국정 반영과 같이 민중의 일상이나 상황에 대한 폭 넓은 이해를 지니고 있었다는 점에 대한 지적은 오늘에 있어서도 귀감이 될 수 있다 하겠다. 나아가 국가 위난의 실질적 수호자들은 궁극에는 의병이나 묵묵히 자신의 소임을 수행한 이름 모를 하급관리와 같은 일반 백성이었지 고관대작의 사대부나 왕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전쟁 후 조일전쟁에 대한 일본의 많은 역사기술에서 발견 되듯이 예기치 못한 의병의 궐기는 전쟁수행의 변수가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 소설이 뛰어난 현대적 테크닉을 구사하여 여느 액션스릴러물들의 재미에 견줄 수 있는 작품이라는 점은 부정의 여지가 없다. 다만 소설의 주요 배경이 되고 있는 왜성과 조선 양민과의 관계성, 그리고 그 실상이나 왜성이 지닌 역사적 의미에 대한 고찰, 디테일이 소홀히 취급된 일본의 상황이 다소 일천하여 문학적 균형을 잃어 역사소설의 위상이 부분적으로 취약하였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럼에도 가독성이나 서사적 재미와 플롯의 정교함에서는 가히 일품인 작품이라 하고 싶다.

구포왜성, 달과그림자, 비밀낭청, 닌자, 조일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