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처음으로 유목문화에 사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나에게는 그들을 무시하는 마음이 있었다. 초원을 떠돌아다니는 인생들이어서 문화라고 할 만한 어떤 부스러기도 갖고 있지 못하는 아주 무식한 족속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것 같다. 그런 관점에 변화가 생긴 것은 인터넷 문화가 유목문화에 비유되는 것을 보면서였다.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는 말도 여기에 해당할까? 무엇이든지 한 곳에 정주하게 되면 썩을 수밖에 없지만 움직이는 것이 썩을 염려는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은 것이다. 그 막연했던 깨들음이 김형수의 “조드”를 읽으면서 더 분명해졌다.

“조드”가 무엇인지는 책 표지에 긴 설명을 붙여놓았는데 일종의 겨울 기근 같은 것이다. 겨울의 혹독한 추위로 땅과 그 위에 사는 생명체들이 피폐해지는 것... 근본적으로는 고원에 물이 없어서 생기는 것인데 피해의 양상에 따라서 몇 가지 명칭을 붙이기도 한다. 첫째는 눈이 너무 많이 쌓여서 가축이 초지를 찾을 수 없는 “하얀 조드”, 둘째는 여름이나 겨울부터 초지가 말라서 겨울 뿌리까지 고갈되는 재난으로 “검은 조드”다. 그리고 극심한 눈보라가 몇 날 며칠이고 계속되거나 콧구멍을 막는 흙바람 때문에 가축이 한 발짝도 나다닐 수 없게 되는 재앙으로 “눈보라 조드”가 있고, 일찍 내린 눈이 따뜻해지는 바람에 철철 녹아서 흐르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강추위에 아주 두꺼운 얼음이 되는 것으로 “거울 조드”가 있다. 그러나 그 분류에 들지는 않지만 사람이나 동물들의 발자국이 많아져서 초원이 파괴되는 “발자국 조드”라는 것도 있다.

“조드”를 해안지대에서 보는 쓰나미에 비하듯이 “조드”는 모두가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자연 재앙이다. 세상에는 사나운 짐승이든지 싸움 잘하는 용사든지 이 재앙에 맞서는 재주를 가진 이가 없다. 그러나 그 “조드”가 지나가면 세상은 또 새로워진다. 그래서 “조드”는 자연이 세상을 정화시키는 장치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 재앙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달랑 천막집 하나 가지고 인생을 꾸려가는 사람들의 삶은 얼마나 겸손한가?

김형수의 “조드”는 그런 재앙 속에서 사는 몽골 유목민들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 속에 칭기스칸이라고 알려진 “테무친”의 이야기가 또 하나의 줄기를 이루고 있다.(하지만 이야기가 진행할수록 칭기스칸의 이야기가 더 두드러지는 것을 보면 “조드”보다는 칭기스칸 이야기라고 보는 게 더 맞다.)

테무친은 몽골 유목민들이 귀족 계층과 그 이하 계층을 흰 뼈와 검은 뼈라고 분류하던 시대에 흰 뼈에 속하는 족속이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가 타타르에 의해서 독살당함으로써 그의 인생 초창기는 아주 비참했다. 그의 가문을 오래 전부터 알고 그 수하에서 얻어먹고 살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은인의 가족을 배신하고 테무친의 비참을 모르는 척했다. 테무친은 그들이 왜 그렇게 비겁하게 살았는가를 궁금해 하지만 세월이 흐름과 함께 이 모든 것들을 이해하고 삶의 원리를 터득하게 된다. 많이 공부하고도 본래의 악한 성품을 버리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는 테무친이 자연을 통해서 세상의 원리와 지도자의 길을 터득해 가는 것을 보면 분명 그는 특별한 사람이다.

그도 보통 사람들처럼 원한과 복수심으로 살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생애에 있어서 가장 가까운 친구 보오르추를 만났을 때 다른 세상이 있다고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 보오르추가 물안개 피는 언덕에 게르를 쳤을 때 테무친은 말이나 치면서 살면 어떨까 생각했다. 하지만 초원에 그런 삶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제멋대로 찾아오는 적들에 의해서 천창이 불타고 하늘이 지붕 되는 꼴을 당하지 않으려면 스스로 지키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흩어진 부족을 모으기로 한다.

유목제국은 모두 혈연 위주의 통치 구조를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테무친은 평민과 종, 그 누구라도 그 자리를 대신하게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신의의 공동체를 이룰 수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칸이 된 이후에도 그와 함께 있으면 누구나 마음껏 제 생각을 말할 수 있었다. 어떤 이들은 칭기스칸의 충성심 깊은 친구들을 보면서 칭기스칸이 복이 많다고 하지만 그것은 전부 칭기스칸이 꿈꾸는 사회구조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 사회가 칭기스칸의 부대로 하여금 얼마나 무서운 전투력을 만들어내는지 다른 지도자들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꿈이 다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