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방.

브람스의 교향곡 제2번이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전원적인 분위기.

그 곳에서 한 남자가 맥주를 마시며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나이는 35세, 공무원이며 그가 하는 일은 국립 교향악단에서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하는 일이다.

바로 이 책의 주인공이다.

그는 자기 직업과 전공에 대해서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연주하는 콘트라베이스가 오케스트라 악기 가운데 가장 중요할 뿐만 아니라 월등히 중요한 악기라고 하는 것을 서슴없이 말한다.

심지어 그는 오케스트라에서 지휘자는 없어도 콘트라베이스는 없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을 강조해서 말한다.

그건 너무 과장된 표현이 아니냐는 의문도 있겠지만 주인공은 적어도 자기 이야기를 그렇게 시작했다.

문제가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게 그의 말일 뿐 다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주인공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런가?

그의 내면은 분노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그 분노가 단순히 자기의 콘트라베이스를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기 때문에 생긴 것만은 아니다.

 

사실 그의 베이스는 사람들이 알아주기에는 너무도 어려운 악기다.

우선 그것은 음역이 너무 낮아서 아무하고도 같이 협연을 하기가 어렵다.

이 말은 곧 주인공이 무대의 중앙에서 관객의 눈에 띄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이유 때문에 그는 항상 무대의 맨 뒷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물론 그것은 서열을 따라서 자릴 배치하는 수직적인 조직체계가 그가 속한 사회를 형성하는 기본 구조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불쌍한 우리의 주인공은 그런 구조에서 자기는 항상 쓰레기 같은 존재로 취급될 수밖에 없다고 스스로를 평가한다.

그래서 그의 내면에는 언젠가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자기보다 낮은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하지만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절망으로 차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짓을 그만 둘 수 없다.

그동안 배운 도둑질이 이것밖에 없기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서는 그가 속한 불공평하기 짝이 없는 이 사회 속에서 아니꼬운 마음을 참아내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콘트라베이스는 그에게 애증의 물건이다.

그의 밥벌이이기 때문에 애인처럼 다뤄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언제든지 때려 부수고 싶을 만큼...

 

그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그와 같은 악단에서 일하는 여자다.

카가 작고, 눈이 까만 그 여자.

이름은 세라고, 소프라노 싱어다.

주인공의 설명으로 추측해보면 이 여자의 노래 실력이 다른 사람에 비해서 특출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것은 오페라에서 이 여자가 맡게 되는 역할이 거의 그렇고 그런 역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인공에게 이 여자는 환상의 목소리를 가졌다.

눈에 뭐가 끼여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일까?

사랑이란 언제든지 그럴 수 있는 것이니까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니까...

하지만 주인공은 그 여자를 생각할 때, 역시 가슴이 아프다.

마음을 꽉 채운 이 여자하고 어떤 방식으로라도 자기를 엮어 보고 싶지만 걸릴만한 게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다 이 여자는 주인공의 마음을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오케스트라 맨 뒷줄에 앉아서 있는 듯 없는 듯 연주하는 주인공의 존재조차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는 다른 남자들과 고급 레스토랑에 가서 저녁을 즐긴다.

주인공에게는 눈이 튀어나오고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은 일들...

그렇지만 그것을 막을 길도 없고, 자기의 마음을 전할 길도 없다.

단지 사랑하는 여인을 가슴에 품고 행복한 상상을 할 뿐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다.

그리고는 처음에 시작했던 것과는 완전히 반대로 자기 자신을 비하시킨다.

자기는 음악가가 아니고 손재주로 밥벌어먹고 있는 기능공일 뿐이라고...

 

이런 식으로 엮여가는 『콘트라베이스』이야기는 특별하다. 별것도 아닌 것으로 긴 이야기를 써내려간 작가의 솜씨가 특별하고, 그것을 쓰기 위해서 남성 모노드라마 형식을 빌었다는 글 쓰는 기법이 특별하고, 이 간단한 이야기가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삶 가운데 있을 숨겨진 내면을 보게 하기 때문에 특별하다. 우리 모두가 청소년 시절만 하더라도 인생의 의미가 자아를 실현하는데 있다고 배웠겠지만 사실 소시민으로서 자기 직업을 통해서 자아를 실현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보통은 부조리한 구조 속에서 불공평한 세상을 욕하며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박차버리지는 못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못마땅한 게 있어도 못 본 척 못 들은 척 하면서 참고 지내는 수밖에 없는 우리의 일상... 그런 면에서 『콘트라베이스』는 우리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상당한 시간 동안 가슴에 담아놓아야 할 책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야기가 끝나면서 다시 흐르는 조용한 음악을 상상해 본다.

이번에는 슈베르트의 5중주곡 <송어> 제1악장이다.

왜 하필이면 마지막 곡이 <송어>일까?

이야기를 끝맺음하면서 올려놓은 마지막 곡으로 콘트라베이스가 연주되는 곡을 선택한 것이 우리를 격려하기 위한 저자의 배려일까...?

(일반적인 피아노 5중주곡은 피아노, 제1바이올린, 제2바이올린, 비올라, 첼로로 되어 있다. 그런데 슈베르트의 5중주곡은 특이하게 콘트라베이스가 들어가 있다. 피아노,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콘트라베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