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울프를 처음 만난 것은 젠채하는 대부분의 문학소녀들이 그녀에 대해 이야기하고 마침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란 시가 유행처럼 번지던 여고생 때였지 싶네요. 그래서 버지니아 울프란 이름은 작가이 전에 패미니즘의 선구자요, 모더니스트로 먼저 다가왔습니다. 유행에 힘입어 <세월>이란  책으로 그녀의 작품을 처움 접하게 되었지요. 긴 호흡이 필요한 그 책이 내겐 솔직히 버거웠지만 내친김에 <델러웨이 부인>까지 읽고는 보란듯이 옆구리에 끼고 문학소녀입내하고 교정을 활보했었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챙피해 얼굴이 다 화끈거리지만 그만큼 울프는 여성들에게 이상스럽게도 우상처럼 숭고하고 무한한 가능성과 상상력의 원천이 되었고, 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했었더랬죠. 한동안 잊고 지냈던 버지니아 울프를 그녀의 처녀작 <출항>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녀와 첫 만남 이후 버지니아 울프는 내게 너무도 멀게만 느껴진 게 사실이랍니다. 솔직히 그녀의 작품을 기피하게 되었지요. 2권을 끝으로 그녀의 작품은 눈길도 주지 않았으니까요. 반갑고 내심 염려스런 마음으로 그녀의 작품을 펼쳐 봅니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의 글이 안, 단어 하나 하나까지도 세월의 흔적 만큼이나 깊은 여운을 남기네요. 27세에 집필을 시작하여 장장 6년에 걸쳐 완성된 소설이라 한 문장, 단어 하나라도 허투루 선택하지 않고 얼마나 신중하게 고르고 골랐을까 싶은 생각이 드네요. 그만큼 문장의 아름다움과 곳곳에서 그녀의 수고로움이 정성이 녹아 있음을 떠올리게 되네요. 예전엔 미처 발견하지 못한 점도 있고, 등장 인물들의 의식의 흐름을 쫒아가다 보면 맞닥뜨리게 되는 생각의 정점에서 일체감을 느끼게 됩니다.


스물 네살의 아가씨 레이첼은 선박 여러 척의 선주인 그녀의 아버지를 따라  '유프라지니' 호를 타고 남미로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함께 승선한 외삼촌과 헬렌 숙모와 함께 말이지요. 뜻하지 않게 델러웨이 부부의 승선과 폭풍우 치던 날, 기습적인 델러웨이씨와의 첫 키스로 레이첼은 몹시 당황하게 됩니다. 그녀는 나이든 두 분의 숙모와 오로지 피아노와 책, 산책과 사색뿐인 삶을 살아왔으니 연애 경험이란 한번도 없는 순진한 쑥맥이지요. 이를 눈치챈 헬렌은 여려사람들과 만남을 통해 다양한 삶의 방식을 접할 기회를 갖게 그녀와 함께 남미의 별장에서 보낼 수 있도록 그녀의 아버지를 설득합니다. 그녀는 근처 호텔에 머무는 다양한 인물들과 만나게 되면서 테렌스 휴잇이라는 한 남자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헬렌은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의 선택으로 인해 한 인간의 삶에 깊숙히 관여하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지요. 약혼한 두 연인은 행복한 와중에도 서로를 사랑하고 있는지 게속된 갈등과 질문을 통해 깊은 성찰을 합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남미의 오지를 탐함하던 중 열병을 얻게 된 레이첼의 죽음을 토해 작가는 우리에게 삶과 죽음에 관해 묻습니다.


솔직히 이 작품 또한 쉽게 읽혀지진 않네요. 하지만 긴장감과 흥미로운 스토리를 기대하였다면 실망감이 들었겠지만 이미 울프의 작품을 읽어봤던 터라 그녀의 작품 스타일과 인물의 행동보다는 사고의 흐름을 상세하게 묘사함으로 작품의 전체적인 성격과 인물의 성격을 드러내고 있으며, 그것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가늠할 수 있게 합니다. 다소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느린 전개는 빠르고 자극적인 이야기에 길들여진 우리에게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합니다.

 

책갈피를 넘기다 만나게 되는 싯구나 군데군데 인용된 책속의 다른 작품들을 만나는 즐거움도 쏠솔합니다. 마치 주인공 레이첼에게서 젊은 시절 울프의 모습을 보는듯합니다. 가부장사회에서 성장한 울프는 작품속에서도 자신의 분신이기도 한 레이첼을 통해 자신의 경험을 투영시키고자 햇으며, 그것에 그치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가 새로운 출항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평생 정신질환을 앓았고 자실기도까지 했던 울프 자신은 레이첼의 죽음을 정신과 영혼이 육체를 넘어서는 존재의 한 순간일 뿐이라 생각했습니다. 당시 너무도 당연시하던 여성의 억압과 성차별에 과감히 도전해 진정한 자신만의 경험세계를 꿈꾸며 이를 언어로 옮기려 했던 울프의 실험적 시도는 언어의 한계가 어디까지 가능한지 엿볼 수 있습니다. 지루함을 이겨내고 등장인물의 의식의 흐름에 동행하여 읽다보면 울프의 매력을 느끼게 되리라 여겨집니다. 인내가 필요하지만 언어의 아름다움과 섬세하고 고요한 문장의 맛을 좀더 깊이있게 알기 위해 그녀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