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날처럼 도서관에서 책을 고르던 중이었다. 출판사의 불황이라고는 하지만, 물밀 듯 밀려오는 책의 파도 앞에서 망망대해를 바라보듯 멍한 기분에 때로 휩싸이고는 하는 독자(獨者)로서 고민하던 중 이었다. 막연함 속에서도 진리를 향한 의지가 샘솟음을 기꺼이 기뻐하며 어슬렁거리던 중...이 책을 발견한다.『책만 보는 바보』,내용은 차치하고라도 제목에서 풍겨오는 강렬한 느낌에 선뜻 책을 들고 나온다.

책만 보는 바보는 바로 18세기의 실학자로 널리 알려진 이덕무 자신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간서치전』이라는 글로 써서 남겨두었는데, 여기에 간서치란 책만 보는 바보를 뜻한다. 왜 그는 책만 읽는 바보가 되어야 했을까? 물론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줄 안다. 그런데 왜 바보라 칭했을까하는 물음은 책 속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덕무가 마흔을 눈앞에 둔 시기에 한탄하는 부분이다. ‘사람으로 태어나 가장 비참한 것은 쓰일 데가 없다는 것이다. 책만 파고들면 무엇 하나? 내 말과 글로는 세상을 조금도 바꾸어 놓지 못하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듯, 당시 실학자들 대부분은 한미한 집안이거나, 서자 출신이 많았다. 주인공 이덕무뿐만 아니라 당시 이덕무가 아끼고 사랑한 박제가, 유득공, 백동수 등의 벗들도 이러한 배경으로 끼니마저 걱정할 경제적 어려움과 학문에 뜻을 두고도 나아가지 못함을 한스러워 하는 개인적 고뇌까지 감당해야하는 어려운 시절이었다. 이 시기의 이덕무 또한 책만 읽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바보라고 치부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덕무와 그의 벗들은 책속에만 머무르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들의 스승과도 같았던 연암 박지원은 “사람들은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싶은 것, 인정하고 싶은 것을 미리 정해두고, 그 밖의 것은 물리치고 거부한다. 그러한 마음에 기초가 되는 것은 역시 지난날에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들은 자신만의 감각이나 경험이다. 이것이 바로 선입견이다.”라고 말하며 선입견을 버릴 것을 당부하였고 자신 역시 당대 최고의 노론 가문이면서도 이들과 벗하며 지내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이러한 스승의 노력덕분인지 그들에게도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는데 청나라에 가게 된 것이다.

역사책에서 만나게 되는 이들의 업적은 바로 이 시기 이후의 업적이라고 볼 수 있다. 유득공, 박제가, 이덕무 등은 청나라에 다녀오면서 조선의 앞날에 대해 구체적으로 구상하게 된다. 구상에 그친 것이 아니라, 정조 시기에는 입궐하여 그들의 생각을 수많은 저서로 남겨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아마도 기득권이 아니었기 때문에 백성의 입장을 살필 수 있었던 것이리라. 개혁은 기득권이 이권을 포기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는 성격이기 때문에 위험하다. 정조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인해 이들의 이러한 노력이 정책으로 나올 수 없었다는 점에서는 애석하지만, 이들의 이러한 노력이 절대 헛된 것은 아니었다.

“시간을 나눈다는 것은, 반드시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는 사람들끼리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다 하더라도 누군가 나의 마음속에 스며들어와 나의 진심을 이해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서로 시간을 나눌 수 있다. 그렇게 서로 나누며 이어지는 시간들 속에서 함께하는 벗이 되리라” 이 책의 강점은 실학자로 뭉뚱그려 알고 있어, 학생시절 외우기 고단했던 인물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들을 사랑하는 벗의 눈으로 만나다 보면 절로 애정이 생기고 그들의 행적을 관심 있게 지켜볼 수 있게 된다. 옛날이라는 먼 시대의 일이라는 고루함에서 벗어나 그들의 일상 속으로 들어가 우리의 옛 벗을 만나는 것은 어떠할지...책을 읽는 이의 마음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마도 이와 같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