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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여 페이지의 책 속에 320여 개의 짧은 글들로 채워진(아니 절반 이상은 그림 또는 여백으로 남겨둔) 이 에세이집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은 당황하거나 신선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책의 형식 즉, 외형적인 면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굳이 양으로 책을 평가하려고 든다면 이 책은 그다지 좋은 평가는 얻을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독서와 평소와 담을 쌓고 지내오다가 빼곡한 문장을 보고 있으려니 어지러운 분들이나 책에서도 여유를 느끼고 싶은 분들에게는 이 책이 좋은 휴식처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외수의 비상법>이라는 부제가 붙은 <아불류 시불류>라는 제목의 이 에세이집은 마음만 먹으면 한 시간 안에도 다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글이 짧다고 작가의 생각의 깊이 또한 얕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특별한 방향에서 쓴 글들이 아니라 다분히 생활 속에서 틈틈이 쓰인 문장이라는 느낌이 드는 만큼 섣불리 만화책 읽듯 읽는 것은 책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서였다. 이틀 정도의 시간을 두고 조금씩 읽었다. 작가의 삶에 대한 통찰력과 유머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책을 읽다보면 마음에 꽂히는 문장들을 여러 번 만나게 되니 분량만 많고 읽고 나서 남는 게 없는 그런 종류의 책들보다는 낫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인상적인 문장들>

‘술 한잔 마시자’라는 표현이 ‘술 한잔 꺾자'라는 표현으로 변하고 ‘밥 한번 사겠다’라는 표현이 ‘밥 한번 쏘겠다’라는 표현으로 변했다. ‘웃었다’라는 표현은 ‘뿜었다’ ‘터졌다’로 통용된다. 세상이 척박해지고 사람들이 공격적으로 변했다는 증거다. p14

인간은 딱 두 가지 유형밖에 없다고 단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 유형은 자기와 생각이 같은 사람, 한 유형은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이다. 그리고 자기와 생각이 같은 사람은 좋은 놈,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은 나쁜 놈이다. 이상한 놈? 그런 건 없다. p29

당신이 모르는 야생식물은 모두 잡초로 분류되나요. p45

세상은 살아갈수록 복잡해지고 인생은 살아갈수록 간단해진다. 그래서 살만 하다는 생각이 들게 되면 떠날 때가 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p55

믿음은 마음에서 만들어지고 오해는 머리에서 만들어진다. p62

이 세상에는 완전한 적군도 존재하지 않고 완전한 아군도 존재하지 않는다. 엄밀히 따지면 내 바깥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다른 내 모습에 불과하다. p107

고수는 머릿속이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차 있고, 하수는 머릿속이 만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p114

예술과 사랑은 길수록 좋고 예식과 축사는 짧을수록 좋다. p129

월화수목 요일은 지구가 빨리 자전하고 금토일 요일은 지구가 느리게 자전토록 만드는 방법을 알고 계시는 분은 연락 주십시오. 교주로 모시겠습니다. p153

없으면 창조하라. 운명도 자신이 만들고 인연도 자신이 만드는 것이다. p193

아파트의 벽두께는 20센티. 그러니까 옆집과의 물리적 거리는 20센티밖에 안 된다. 하지만 마음의 거리는 2만 리 정도. 도시에서는 모두가 타인이다. 전철에서 무려 30분씩이나 어깨를 맞대고 출퇴근을 해도 말 한 마디 나누지 않는다. 좀비들 같다. p1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