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파룩'이라는 인물을 내세워 이 소설 속의 책<하얀 성>이 마치 현존하는 것처럼 독자를 현혹한다. 파룩이 어느 문서보관소에서 발견한 <하얀 성>은 터키(오스만) 함대에 의해 나포된 배에 타고 있던 어느 이탈리아인이 이스탄불에서 노예로 생활하면서 겪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소설의 배경은 17세기이며, 등장인물 중 일부는 실존인물인 역사소설인 셈이다.

 

소설 속의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는 서양의 학문에 능통하며 그 덕분에 권력자인 파샤의 눈에 들고, '나'와 무척 닮은 '호자'(이슬람의 교리를 가르치는 선생)란 인물과 함께 파샤의 아들의 결혼식에 쓰일 폭죽을 만들면서 두 사람의 인연은 시작된다. 그리고 파샤에게 이슬람교로의 개종을 강요받는 '나'는 개종을 거부하다 죽을 위기에 처하지만 호자가 '나'를 노예로 선택하면서 죽음을 모면한다. 사실, 호자는 '나'로부터 서양의 학문과 지식을 배울 목적으로 '나'를 노예로 지목한 것이고, '나'로부터 배운 지식들을 바탕으로 호자는 오스만제국의 최고통치자 '파디샤'의 신임을 얻는다.

 

이 소설은 호자가 파디샤의 신임을 얻으면서 황실점성술사로 올라가는 과정과 이를 둘러싼 정치적인 암투를 그리고 있지만, 이것보다도 '나'와 호자가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각자에 대해 글을 쓰는 게임 즉, 각자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있다. '나'는 이 글쓰기를 통해 호자를 조롱하기도 하고 호자에게 연민을 느끼기도 하는데, 이 과정을 통해 두 사람은 서로의 삶을 이해하게 되고, 자신과 상대방의 정체성을 혼동하는 상황까지 이른다.

 

'나'는 처음에는 고국 이탈리아로 돌아가 가족과 약혼녀를 다시 만날 궁리만 하지만 20년 넘게 이스탄불에서 살면서 터키에서의 생활에 차츰 적응하게 되고, 고국으로 돌아갈 필요성을 못느끼게 된다. 반면, 호자는 자신을 제외한 터키인들(심지어 파디샤를 포함해서)을  '나'의 앞에서 '그들'이라 칭하면서 멸시하며 서양을 동경한다. 두 사람은 서로를 통해 상대방이 속한 문화를 이해하고 거기에 동화되는데, 이는 이 소설 속의 책<하얀 성>의 결말 부분에 잘 나타난다. 폴란드 원정에서 하얀 성을 점령하는데 실패한 두 사람이 서로 옷을 바꿔입게 됨으로써 상대방의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호자는 이탈리아에 가서 '나'의 인생을 살고, '나'는 황실점성술사로서 호자의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이 소설을 거시적으로 본다면, 이탈리아와 터키가 각각 상징하는 서양과 동양이라는 문화가 충돌하고 결국 상대 문화를 이해하게 되는 문화 상대적인 관점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미시적 관점에서 본다면, '나'와 호자가 긴 세월을 함께 지내면서 서로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부부도 함께 오래 살다보면 서로 닮는다는 말처럼.

 

이전에 읽은 오르한 파묵의 <새로운 인생>이나 <내 이름은 빨강>에 비하면  이 소설은 지루하다. <내 이름은 빨강>보다는 좀더 난해하고, <새로운 인생>보다는 조금 더 단조로운 느낌이다.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지만, 재미라는 관점에서 추천하고 싶지는 않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