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라는 단어를 보면 떠오르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김승옥의 단편소설 <무진기행>속 안개, 안개 꽃, 그리고 안개가 낀 날은 맑다는 점 등. 스페인의 교육자이자 철학자라는 우나무노가 쓴 이 소설 <안개>의 의미는 스페인어로 소설(novela)과 비슷한 단어가 안개(niebla)이기 때문이다. 즉, 기존의 소설의 정형화 된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식의 소설을 창조하고자 한 작가의 열망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책 속에서는 자꾸 소셜이라는 표현이 쓰이는 걸로 봐서 아마도 국내작가가 썼다면 소셜이나 쇼설 쯤이 제목으로 적당했겠지만.

 

소설은 '아우구스토'라는 젊은이가 우연히 보게 된 '에우헤니아'라는 여성에게 반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리고 있다. 에우헤니아를 보게 되기 전, 그에게 아름다운 여성이란 단지 추상적인 의미였지만 에우헤니아를 통해 구체적인 실체를 지닌 여성의 아름다움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에우헤니아 뿐만 아니라 그가 만나는 모든 여성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점이다. 어떤 이성에게도 아무런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불행이지만, 모든 이성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괴로울 것 같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소설 속의 아우구스토 만큼 많은 유산과 높은 교육수준, 준수한 외모를 가진 소위 엄친아라 불렸을 남자가 무엇때문에 한 여자에게 그리도 집착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물론 아우구스토는 에우헤니아를 여성의 미(美)에 관해 눈 뜨게 해준 은인으로 여기고 그녀에게 보답을 하고자 하고 또 일종의 실험을 해보고자 하지만. 나라면 애인까지 있는 그런 여자에게 접근하는 것보다 다른 여자들과의 연애를 즐겼을 것이다. 그가 로사리오나 에우헤니아에게 갈구했던 게 꼭 정신적인 사랑은 아니었다는 점이 책의 중간중간 드러나 있으니 더욱 그렇다. 어쨌든 불쌍한 아우구스토는 에우헤니아와 그녀의 애인인 마우리시오에게 이용만 당하고 자살을 결심한다.(아이러니 한 점은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인 빅토르가 그가 자살하도록 꼬득인다는 점이다. 물론 이 역시 작가의 계산이지만.) 그리고 작가 우나무노를 만난 아우구스토는 자신이 작가가 만든 허구의 인물이라는 점을 알게되고 스스로의 의지로 자살을 결심하지만, 작가는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결국 아우구스토는 우나무노를 화나게 해서 작가에게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작가가 소설 속에 직접 개입해서 인물의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내용 자체가 파격적이었다. 작가가 이를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인간의 자유의지였겠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의 서문은 아우구스토의 절친 빅토르가 쓴 걸로 되어있고, 이에 대해 우나무노는 빅토르의 글들 중 몇 가지 마음에 안드는 점이 있는지 그의 존재를 없앨 수 있다고 협박을 하는데 이 또한 작가와 소설 속 인물의 자유의지에 대한 설전이라고 보여진다. 서문은 좀 추상적이고 잘 읽히지도 않으니 가볍게 읽을 것을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