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이 대니얼 데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비틀면서 다시 쓰여졌다면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은 거의 한 세기 전에 발표된 r.m.밸런타인의 <산호섬>을 현실에 맞게 다시 쓴 책이라 할 수 있다. <파리대왕>은 핵전쟁을 피해 아이들을 태우고 피란을 가던 비행기가 어느 무인도(해설에는 태평양의 어느 섬이라고 했지만, 텍스트에서 태평양이라고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에 불시착하면서 아이들이 겪는 모험담을 그리고 있다. (모험담이라고 해봐야 섬에는 아이들 말고는 없으니) 아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 공포감, 인간의 본성 등을 다루고 있다. 

 

이 소설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랄프(이 책의 번역가는 랠프로 번역했지만)는 우연히 주운 소라를 불러 섬에 흩어져 있던 아이들을 소집한다. 그리고 랄프는 외모와 소라를 가진 점 때문에 다수결로 지도자로 선출된다. 섬에서 구조되기 위해 랄프는 산 위에 봉화를 피우고, 오두막을 짓고, 화장실을 정하는 등 문명사회에서 교육받은 대로 규칙을 정해 아이들에게 따르도록 한다. 처음에는 이런 것들이 질서있게 잘 지켜지는 것 같지만, 봉화를 책임진 잭을 비롯한 사냥패들이 야생돼지 사냥에 한눈을 판 사이 봉화는 꺼지고, 그 사이 배가 지나가면서 랄프는 잭의 패거리를 질책하게 되는 과정 속에서 랄프와 잭 사이에 갈등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한편, 섬에서 무서운 짐승을 목격했다는 아이들의 증언이 잇따르고, 랄프와 잭을 비롯한 몇 명의 소년들이 섬을 수색하는데, 그들이 밤에 시체를 목격하고선 정체모를 짐승으로 오해를 하면서 공포감은 현실이 된다. 결국, 잭을 위시한 사냥패들은 스스로 야만족임을 자처하며 랄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사냥해서 잡은 야생돼지 고기를 미끼로 랄프를 따르던 아이들을 끌어들인다. 이 과정에서 모두들 두려워하는 짐승이 사실은 시체라는 것을 확인한 사이먼이 잭의 패거리에 의해 살해되고, 랄프의 참모 역할을 하던 돼지(유일한게 이름이 아닌 별명으로 등장함.) 역시 봉화를 피우기 위한 유일한 도구인 자신의 안경을 찾으려다 살해된다. 이어서 소설의 하이라이트이자 갈등이 최고조로 달한 부분인 결말부에서 책의 패거리들은 숲을 태우면서까지 랄프를 찾아 없애려하고, 이 추격전은 섬에 난 불을 보고 구조하러 온 영국 해군 장교에 의해 끝이 난다. 

 

정확한 나이는 모르겠지만, 소설 속에는 대여섯 살의 꼬마부터 열 두살 정도의 소년까지 모두 남자아이들만 등장한다. 랄프를 비롯한 아이들은 섬에 불시착하고 생존을 위해 사회에서 교육받은 대로 처음에는 모두들 협조(봉화피우기, 오두막 짓기, 용변 볼 곳을 지정해 이용하기 등)하는 듯 한다. 하지만 사냥에 재미를 붙인 잭의 패거리들(생존보다는 쾌락을 추구하는 비문명족)과 랄프를 따르는 아이들이 서로 대립하면서 대장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고, 불분명한 사물에 공포를 느껴서 사냥물을 재물로 바치고, 친구를 죽이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한다. 작가는 순수하리라 여겨지는 아이들을 내세워 문명과 단절된 상황에서 타락하는 인간의 본성을 질타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번역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겠다. 필자가 읽은 책은 2007년에 나온 1판 27쇄로 그 뒤에 개정판이 나왔는지 모르겠으나, 이 책의 번역수준은 참 엉망이다. 오탈자도 여러 군데 눈에 띄고, 무엇보다 한자어의 남용, 틀린 맞춤법 표기, 부자연스러운 표현(예를 들어 '행복한' 이라고 하면 될 걸 '행복스러운'이라고 한다던가, '느끼다'라고 하면 될 걸 '감촉한다'라고 번역한 점 등이다.) 등이 눈에 상당히 거슬린다. 이런 번역들 때문에 소설 속 무대인 섬의 지형들이 머리 속에 잘 그려지지 않았고, 재미도 반감되었다. 하지만 소설 자체는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