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기 때문에’ 용서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 그리고 운명

기욤 뮈소의 소설을 몇 권 째 정독 중인 나에게 이 책은 그의 일관된 주장들을 들여다볼 수 있던 시간이었다. 다른 책들보다도 특히나 이번 책은 반전이 독특한 책이다. 여기엔 겉으론 멀쩡하지만 정신적으로 어떠한 계기들로 인해 피폐한 3명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유명한 정신과 의사에서 딸을 잃어버린 뒤 거리의 나그네로 전락한 ‘마크’, 억만 장자 상속녀지만 온갖 일탈로 스캔들의 여왕인 ‘앨리슨’, 그리고 죽은 엄마의 복수를 꿈꾸며 뉴욕 밤거리를 헤매는 소녀 ‘에비’. 그들 중 주요 시점은 ‘마크’다. 그들은 연관성이 전혀 없어보이지만 어떠한 ‘힘’에 의해 필연적으로 만나게 된다. 이를테면 그건 숙명이다.

표면적으로 그들을 당긴 힘은 운명과 우연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의 마음 속에 필요한 요소는 증오에 대한 용서였다.

"...막상 저에게 비극이 닥쳤을 때 평소 많은 사람들에게 해준 조언이 정작 제 자신이 고통을 치유하는 데는 그리 유용하지 않더군요." (p249)

그들은 마주하게 된 냉혹한 현실과 진실 속에서 애써 부정하는 사람들이다. 그 셋을 보고 있으니 내 마음 또한 짠해졌다. 이를 테면 살인마를 앞에 두고 초인적인 힘으로 살해 욕구를 눌러담는 한 사람을 보는 듯한 느낌이랄까. 우리 모두가 그렇듯 엄청난 비극 앞에선 한없이 약해지는 것은 사람이다. 의사인 마크조차 자신 앞에 닥친 죽음에의 수용은 쉽지 않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그들이 조우할 시간과 포용력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조작된 계기로 만나게 된다.

“...아름다운 당신이 어떻게 인생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죠? 정말 그렇다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보는 건 어때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잖아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겁니다. 당신은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을 만큼 돈이 많지 않던가요?”

“저 역시 그러고 싶지만 어떻게 인생을 다시 살 수있죠? 아무리 맘에 안 드는 인생이라도 살아온 대로 계속 살 수밖에 없잖아요. 그게 바로 인간의 운명 아닌가요, 의사선생님?” (p250)

앨리슨과 마크의 대화다. 여기서도 마크는 정신과 의사 이력이 녹슬지 않은 듯 치유 능력을 맘껏 발휘한다. 정작 자신은 더 깊게 가라앉고 있으면서 말이다. 마크도 앨리슨도 정작 두려움을 끌어안은 채 만났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나약한 존재는 때론 어느 계기로 인해 강해진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라는 강력한 치유제다. 사랑에는 이성만을 뜻하는 건 아니다. 동성 간, 혹은 가족 간, 혹은 이웃 간의 사랑 또한 포함하고 있다. 마크가 앨리슨을 처음 봄에도 그들의 대화는 순조롭다. 마크는 진정 앨리슨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이는 사랑이 지닌 용서라는 포용력이었다.

마크는 앨리슨에게 인생을 바꿔보라고 한다. 운명학에선 이 또한 정해진 루트라고들 말한다. 인생을 바꾸는 터닝 포인트. 눈에 보이지 않게 그들 사이에 이미 벌어지고 있었다. 우리모두 첫 발을 내디딜 땐 너무도 두려워한다. 갈래길에서 방황하는 양처럼 주저앉아 시도할 생각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혼자서 생각할 땐 너무도 어려워 보이던 길이 다른 이들의 관심과 사랑 속에서 찬란한 금(金)길로 변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두려움 속에서도 한결 편한 마음을 동시에 지닌 채 한 발 한 발 내딛다가, 곧 힘차게 그 바뀐 길을 걷기 시작한다. 마치 원래 그 길을 걸었던 것처럼. 그 길엔 정답이 없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후회와 만족감은 그 뒤에 따르는 부수적 동반자일 뿐이다.

편견을 제거하고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난 그들은, 곧 이어지는 진실(=반전)에 놀라고 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들은 어느새 서로를 사랑이라는 이름아래 용서하고 포용한다. 이른 바 현실 수용이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보자. 만약 그들이 정보를 들은 뒤 만났더라면 어떤 결말을 낳았을까. 아마 그건 파국으로 치닫지 않았을까. 어떠한 껍질도 뒤집어쓰지 않은 채, 원초적 인간의 감정으로 맞댄 그들에게서 만들어진‘사랑’이란 진실성은 그들의 인생을 획기적으로 바꾸게 된다. 이는 정말 작은 곳에서 비롯되었다. 자그마한 물방울은 모여서 웅덩이가 되고, 이는 곧 개울을 형성한다. 이 모든 건 운명이다.

(운명의 수레바퀴를 보면서) 자세히 보니 그림에 나타난 기하학적 무늬는 법의 바퀴를 상징하고 있었다. 어떠한 힘으로도 절대로 흐름을 바꿀 수 없는 인간 운명의 법칙...... 출생, 죽음, 환생이 이어지면서 모든 업보가 영원히 되풀이된다는 법칙..... (p130)

운명이라는 생각 속에서 그들은 하나가 된다. 누가 볼 땐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의 선택일지 몰라도, 길잃고 상처받은 영혼들은 제각기 떠나왔던 자아의 고향으로 되돌아간다. 우리가 행하는 자그마한 행동들은 모두 흐름을 바꿀 수 없는 운명으로 인해 일어난다고 생각하면 편해진다. 하지만 인간은 감정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언제든 변수는 존재한다. 그 오차는 알 수 없다.

누군가는 어쩌면 오차들까지도, 운명이라 생각한 선택도 모두 법의 바퀴 속에서 굴러가는 일상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사랑이란 감정 또한 운명일까. 운명을 포용하는 사람들은 사랑을 느끼는 사람들일 것이다. 우리가 느끼는 희로애락 속엔 제각기 다른 고통이 스며들어 있다. 운명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그에 대해 무념무상인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모든 감정의 기저에 ‘사랑’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람은 현실을 기꺼이 수용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이는 또한 운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