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과 가족을 벗어나 진정한 ‘청사진’을 찾는 한 남자를 좇다 : ‘빅 픽처’

 

 

나는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어. 나는 이 통근 열차를 타고 있을 사람이 아니야. (p35)

네가 알던 삶은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 (p136)

이제부터 내 이름은 게리 서머스다. 나는 사진가다. (p264)

 

벤은 월가의 변호사로 남부럽지 않게 산다. 두 아들을 둔 가장으로 본래 사진가를 꿈꾸었다. 하지만 그는 안정적 생계를 위해 직업으로서의 사진찍기 보다는 취미로서 즐긴다. 그렇지만 자신의 삶은 늘상 2% 부족하다. 어느 날 필연적 동기로 인한 우발적인 살인을 하게 되고, 그는 자신이 죽인 사진사 게리로 변신, 몬태나 주로 도망가 새 삶을 산다. 어느 날 자신의 사진이 지역 신문에 실리게 되고 그는 일약 스타덤에 오르지만 숨겨온 과거가 들통날 위기에 처한다. 과연 그의 선택은 어떻게 될까?

 

인생은 항상 선택의 연속이다. 어릴 땐 자신만의 청사진을 가진 채 달려가지만 점점 나이가 들수록 우리 주위에 도사리는 많은 조건들이 우리를 제약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세상 속 렌즈로 우리만을 비추고 있던 자아의 눈은 타인을 향해 초점을 맞추게 되고 우리는 어느덧 하나씩 자신의 가치를 포기한다. 그 중에 가장 큰 제약은-아이러니하게도-우리를 지지하는 동지인 '가족'일 것이다.

 

어쩌면 가족뿐만 아니라 자신을 옭아매는 근원적인 욕구일지도 모른다. 그 욕구는 크게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안정을 추구하는 기저의 마음 속에서 샘솟는 욕구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선택에 대한 후회를 회피하는, ‘운명의 결과’라고 치부하려는 욕구일 것이다. 무수한 사람들은 그 속에서 용기를 잃지 않으려는 자기방어기제와 차선책 길을 선택한 심리에서 비롯되는 자기연민을 끌어안고 살고 있다.

 

벤은 그 두 가지를 다 끌어안은 중증환자였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이나 속에선 언제 용광로가 끓어오를지 모르는 불안감을 지닌 사람, 그것이 월가의 변호사로 살던 벤이었다. 사실상 무너져가는 ‘가족’이란 굴레 속에서 자아를 바라보려던 렌즈(=눈)를 덮개로 교묘히 덮고 살아가려다 마침내 덮개는 벗겨지고 만다. 그리고 그만의 렌즈로 청사진을 찍기 시작한다. 그는 이제 완전히 눈(=렌즈)을 뜨게 된다.

 

이 소설은 어찌보면 음습하다. 어둡다고 할까. 한편으로는 참으로 서글프다. 어쩌면 게리로서의 제2의 삶을 사려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도를 잘라버리려는 가위일지도 모르겠다. 게리로서의 그의 삶은 처음엔 위태롭지만 유쾌했다. 하지만 책장이 끝으로 달려갈수록 위기에 봉착한다. 벤은 게리로 변했고 게리는 또다시 제3자로 변하게 만든다. 카메라 속 세상은 그에게 유리알처럼 반짝이는 플래시 같은 삶을 주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난 그가 패배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도는 좋았다.

“‘사진가는 수동적인 관객이 될 수 없다. 사진가는 사건에 사로잡혀 있을 때에만 진정으로 빛날 수 있다.’” (p132)

그는 진정으로 자신의 사건(=삶)에 적극적으로 뛰어든 사람이었다. 자신만이 만들 수 있는 청사진을 제작하기 위해 사진가 게리는 사방팔방 뛰어다녔다. 나에게도 제일 좋았던 캐릭터는 월가의 벤보다는 사진가 게리였다. 그는 돈이라는 유형적 가치를 떠나서 진정 자신의 삶을 만들어나가는 이 시대의 Winner였다.

 

실상 지금의 ‘나’에게도 언제나 꿈이 있다. 나도 주변 사람들(이를테면 가족, 친척, 친구 등)의 레이더 망에서 벗어나지 못해 전전긍긍한다. 일탈을 꿈꾸지만 족쇄를 차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나만의 청사진은 항상 자아의 카메라 속 필름으로 찍어나가고 있다. 사람들은 말한다. “꿈이 있는 한 늙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사는 것도 운명이야. 우린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해.” 이것은 과연 핑계로 치부할 수 있을까.

 

사람들의 말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그리고 자신이 선택한, 미리 찍어둔 청사진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것을 너무나도 두려워한다. 무언가가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수많은 ‘벤’들이 이 땅에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안드로메다 이상을 가지지 않고 웬만한 지구별적인 꿈들을 지닌 욕망이라면 한번쯤 자신의 인생 카메라로 자아의 청사진을 찍어보는 건 어떨까. 누가 아는가. 일정 기간 동안 꾸준히 자신만의 사진을 만들어나간다면 언젠간 온전한 모습을 갖춘 청사진을 완성할 수 있을 지 말이다. 그건 자신의 의지만이 알 것이다!

빅픽처, 더글라스케네디, 밝은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