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삶의 밑바닥을 많이 보았다고, 그래서 삶의 고통이 무엇인지 감히 안다고 말할 수 있다. 삶의 구정물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혐오하고 때론 동정하며, 등을 구부린 채 눈물을 게워내고 밑바닥을 더듬거리며 살아온, 해리의 삶을 닮은 그들의 이야기는 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들의 이야기였으며 또한 나의 이야기였음을 고백한다.

생의 가장 검고 어두운 상처를 묻어둔 채 때로는 선을 행하며 때로는 악을 행하며 살아가는, 내 가슴 밑바닥을 깊이 훑고 간 그녀의 이야기를 나는 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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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가정을 가진 유부녀라는 사실을 감춘 채 남자와 결혼을 해서 딸을 낳고, 어느 날 그것이 들통 나 남자에게 폭력을 당하고 집을 나간 여자. 그 후 딸을 데려갔다가 다시 빼앗기고, 애원하며 용서를 비는 과정을 반복하다 결국 딸을 포기하고 영영 소식이 끊긴 여자, 그녀의 친어머니.

그 후 그녀는 달동네에서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아버지와 살아가며, 때때로 냉동실에 얼려둔 약병을 꺼내달라는 그의 말에 그것을 묵묵히 꺼내온다. 그것이 농약인 줄 알면서도, 그가 그걸 마시고 죽고 싶어 한다는 걸 알면서도 매번 그것을 꺼내오던 자신의 모습을 용서할 수 없다며 그녀는 울었다.

생은 어쩌면 죽음보다 모질고 질긴 것이라서 매번 그것을 토해내버리곤 하던 그녀의 아버지는, 어느 겨울날 그녀가 먹을 밥상에 여느 때처럼 색이 고운 계란후라이를 올려두고는 집을 비웠다고 한다. 한참 후 집으로 들이닥친 경찰들이 내민 사진 속에는 푸른 빛으로 딱딱하게 굳어버린 그의 얼굴이 담겨 있었다. 영안실에 들어선 열네 살의 그녀는, 싸늘하게 식은 채 누워있는 그의 시신을 확인하며 전율했다.

한부모 가정에서 혹여나 딸이 상처 입을까 한겨울에도 수돗가에서 얼음을 깨 빨래비누로 그녀의 옷을 늘 새하얗게 빨아주었던, 초라한 그의 모습이 창피해 운동회에 오지 말라며 뛰어가던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통닭을 사서 교문 밖을 서성였던, 고된 노동에 온 몸이 군데군데 상처로 뒤덮여 몸져누우면서도 그녀의 밥그릇 위에 늘 고기와 계란을 올려주었던, 늦은 밤 잠든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자주 흐느끼곤 했던, 끝내는 나무에 목을 매 생을 마감한 그녀의 아버지.

그런 그녀의 아버지가 아내를 때려 집을 나갔고, 이제는 그녀를 때리고 그녀의 몸에까지 손을 댄다며 수군거리던 동네 아낙들. 그 속에 고립되어 외로웠을 그녀와 그녀의 아버지. 남을 비방하기 좋아하는 얕은 마음과, 그들의 삶은 외면한 채 자행되는 깊이 없는 단편적 추측과 판단은 약자를 얼마나 절벽으로 몰아세우는가.

세상이 조금만 덜 눈부셨더라면, 그래서 그녀의 아버지가 조금이라도 덜 절망스러웠더라면, 세상이 가진 것 없는 그들도 따뜻한 숨결을 가진 존엄한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했다면, 이제 성인이 된 그녀는 나이 든 아버지의 밥그릇에 따뜻한 계란후라이를 얹어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또한 마찬가지로 가난하고 불행했을, 어린 딸을 포기한 채 돌아선 그녀 어머니의 생은 과연 어느 뒤안길로 흘러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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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스러운 학대의 기억을 품고 살아온 이들을, 그들이 행하는 행위만을 보고 과연 악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또한 그들이 상처 입은 영혼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맹목적으로 감싸는 것 또한 선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늘 그 경계에서 고뇌해왔다. 과연 누구를 선이라고 규정할 수 있으며 누구를 악이라 규정할 수 있을까. 선과 악을 이분법적으로 간편하게 나누어 칭송하고 단죄하기에는 삶은 너무나 복잡한 유기체들로 연결되어 있다. 선과 악은 잘 짜인 클리셰처럼 진부하거나 온당한 모습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복잡하게 얽힌 삶 속에서 한 인간이 지속적으로 선택하고 행한 최종본을 놓고서야 선 혹은 악에 가깝다고 감히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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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행위로 비판받아야 하지 존재로 비판받아서는 안 된다. 상처는 치유되어야하고, 죄악은 존엄으로 돌아가야 한다. 학대를 받은 과거를 갖고 있다 해도, 우리에게는 선택이라는 최후의 저항의 공간이 있다. 우리는 내면 가장 낮고 음울하고 깊숙한 구렁으로 내려가, 그 밑바닥에서 똬리를 틀고 있는 자신의 그림자를 직면하고 치열하게 싸워 끝내는 마지막 한 줌의 존엄을 끌어올려야만 한다. 진정한 치유는 자신과의 정직한 대면에서부터 시작되며, 그것은 영성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어떤 생을 살아왔건,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스스로를 구원할 최후의 자유의지는 죽음을 맞기 직전까지 모든 인간에게 허락되어 있다. 결국 악은 자기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 선택의 문제 아닐까. 우리의 죄악과 불행은 어쩌면 자신의 영혼을 헐값에 내던지는 것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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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와 닮은 어린 시절을 견디며, 이나를 닮은 삶을 동경하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우리가 내는 세금으로 공짜 밥 먹는 주제에 감히 밥을 남기냐”는 교사와 학우들의 모멸을 견디던 어린 날의 기억, 사랑에 굶주려 아무에게나 자신을 헐값에 내어주고 그 대가로 많은 고통을 받은 기억, 간절한 꿈마저 가난 속에 묻어야만 했던 아픔들. 지금의 나는 안다. 내가 한 때 동경했던 그들 또한 때로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앞을 향해 나아갔기에 그곳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그러나 모든 것을 걸 기회조차 가져보지 못한 채 이제는 벗어날 수도 없는 인생의 밑바닥에 갇혀 버린 사람들의 삶은 과연 어떻게 위로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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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쩌면 모든 그녀들과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우리의 삶이 과연 은총없이 혼자서 살아올 수 있었던 건지를. 우리가 그들의 상황에 처했다면 과연 우리는 어떤 선택을 했겠는가를. 우리는 그들 중 단 한 명의 영혼에게라도 귀 기울인 적이 있는가를. 죄 없는 자만이 여자를 돌로 치라 했던 예수의 말처럼, 우리에게 과연 그들을 판단하고 단죄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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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우리는, 단 한 명의 영혼의라도 인간의 존엄을 짓밟혀 생을 스스로 저버리지 않도록, 영혼의 마지막 호흡조차 질식당한 인간이 괴물이 되어 악을 악으로 되갚는 살육의 현장을 목도하지 않도록, 자신이 한 때는 여린 영혼을 가진 인간이었다는 것조차 잊은 채 검은 아가리를 벌리고 약자들을 집어 삼키는 괴물의 방관자가 되지 않도록, 포장되고 허황된 삶의 겉껍데기를 버리고, 때로는 외면하고 싶은 삶의 본질인 더 낮고 낮은 바닥으로 내려가 그들의 상처와 삶을 바라보고 끌어안아야 할 것이다. 더 늦기 전에, 지금도 눈 내리는 찬 골목길에 맨발로 서서 울고 있을 이 땅의 수많은 해리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