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하는 지성

1. 책 뜯어 먹기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 30년을 서울에서 생활했고 이후 십여 년이 지난 지금 일산에 둥지를 틀고 있다. 어린 시절 서울에서 살았다고는 하나 자하문 밖 능금이 많이 나던 세검정에서 살았으니 촌과 다를 바 없는 곳에서 여름 방학이면 능금을 따고, 개울에서 수영하고, 겨울이면 썰매를 타며 얼음을 지치는 것이 일상이었다. 세월이 흘러 그렇게 커 보였던 민둥산은 파헤쳐져 고급 빌라들이 즐비하게 들어섰고 마을 어귀 개천은 복개공사로 말미암아 흔적없이 사라져 내게 고향이라는 의미는 이미 무형으로만 남아 있다. 이도 세월이 나이를 먹을수록 기억 속에서 사라질 터 그래서 서글프고 또 서글프다.

점심시간 짬을 내어 펼친 책이 [공간의 요정]이다. 참 난감했다. 삽화가 반 이상을 차지하고 글은 초등학생 동화책에서나 볼 수 있는 커다란 크기. 나같이 눈이 어두운 사람에겐 쏙쏙 들어온다. 아마도 주인공의 입장에서 작품이 만들어지다 보니 최대한 그에 대한 작가의 배려심이 엿보인다. [공간의 요정] 이 책 참 좋다. 여느 소설이나 논문, 사설보다 우리나라 현실에 대한 비판은 날카롭다 못해 하늘을 찌른다. 시장의 '도시성형계획'으로 말미암아 사라지는 도시 곳곳 기억의 장소와 정든 공간, 시를 읽지 않는 현실을 풍자한 작가의 의도는 우리의 고개를 힘없이 떨구게 한다. 어찌 보면 두 가지 의도가 조화를 이루기에는 버거우리라 추측되지만, 작가의 섬세한 감수성과 시적 운율과도 같은 스토리텔링은 독자에게 많은 사색의 시간을 갖게 한다.

요정의 등장. 각기 다른 공간에서 살아가는 요정의 등장은 미처 생각지 못한 작가의 풍부한 상상력의 산물이다. 작가의 의도야 어떻든 내게 있어 이 요정들의 모습은 바로 인간의 형상이다. 공간이 사라질 때 핏기없는 인형마냥 하나둘씩 죽어간다는 설정은 소스라치고 섬뜩하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의 자화상 아니던가. 아스팔트와 흙의 경계를 본 일이 있는가. 그 경계에는 여느 공간보다 수풀이 무성하며 파괴에 대응하는 자연의 질곡한 본성이 잘 나타나는 곳이기도 하다. 역설적인 표현을 빌자면 우리는 벌거벗고 자연과 함께할 의무와 사명을 가져야 한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도심을 가꾸고 아름다움과 향기가 넘치게 하는 모체는 콘크리트와 불도저가 아니다. 사람에게서 향기가 나듯 자연의 향기로움이 없으면 인간은 존재 이유가 없다. 인간의 이기와 허영은 기득권자의 배를 채우고 공간을 잃어가는 참된 시민과 자연은 무기력하게 허물어진다. 썩어가는 청계천을 살린다고 콘크리트로 뒤덮고 한강 하류에서 하루 12만 톤의 물을 인공적으로 끌어와 흘려보내며 한 해 유지비는 100여억 원에 육박한다. 이것이 생태이던가. 로봇 물고기가 한강과 4대강을 유유히 떠도는 그날, 인간은 자연에 등을 돌린 날이 될 것이다.

그냥 손을 잡아줘요. 딴 얘길 하면서 같이 걸어 줘요. '잘 있을까? 죽진 않았겠죠?' 따위의 생각을 못하게... 12장 그리고 중.

2. 끄트머리

살아 있는 지성은 원치 않는다. 실천하는 지성이야말로 시대를 대표하는 원동력이자 힘이다. 문학계를 비롯하여 사회 구성원 하나하나 실천하는 지성으로 깨어날 때 우리는 희망있는 시대를 살아간다는 자각을 하게 된다. 자연앞에 진보와 보수가 따로 없다. 미안한 얘기지만, 그들이 후손에게 넘겨 줄 자연과 권력의 그늘에서 한숨짓는 서민의 마음을 어루만질 때, 최소한 인간의 도리를 지킨 것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김한민 작가에게 무한의 박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