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서점 인터파크도서

* 에세이에 가까운, 책 읽기 실패에 대한 기록.

책은 분석하기보단 즐기는거라 생각했다. 어느 날 서점에서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을 집어든 뒤 놀란 마음으로 다시 진열대에 돌려놓은 건 그런 이유에서였을거다. 그 책이 <센티멘털>(문학동네.2006)이었다. 일본 소설계의 천재라 불릴 정도라해서 집어들었는데, 그 시간은 몇 분도 채 되지 않았다. 세 번째 단편 '추억' 때문이었다. 거의 공백인 종이에 단어 몇 개만이 흩뿌려져있었다. 이게 도대체 뭐지란 생각에 처음엔 한참을 들여다보고 말을 만들려 했지만 이내 실패했다. 결국 짜증과 함께 천재의 책은 내 손에서 멀어져갔다.

그런 책을 다시 집어든 건 지인의 리뷰 때문이었다. 차근히 분석된 글을 읽다보니 오기로라도 도전해보고 싶어진거였다. 읽는 내내 천재란 이런 것일까? 란 물음이 절로 나왔다. 독자따위 전혀 배려치 않은 긴 문장. 형이상학적인 언어. 단어 자체만으로도 감각적이라 노래를 따라부르듯 읽어내려갔지만 그 속에서 난 혼란스러웠다.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전혀 알 수 없었기에.

섣불리 책을 집어들었단 생각이 든 건, 책을 읽고 다시 리뷰를 읽을 때였다. 여전히 난 리뷰조차 후련하게 이해하지 못했으니. 게다가 '추억'은 결국 속시원히 읽어내지도 못한 채 책을 덮어야 했다. 그럼에도 이런 고백의 자리를 갖는 건, 나머지 세 편을 읽고 나름의 감상을 했다는 사실에 스스로를 위로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변명해야겠다.

작가는 기억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든다. 첫 단편 '청수'에서 사내는 자신의 기억을 불신한다. 비스킷을 먹은 시점에서 손 위에 있던 비스킷과 단지 그 상(像)을 어떻게 구분하냐는거다. 이미 존재하지 않는 비스킷에 대해선 두 가지 모두가 잔상일 뿐이라면서. 논리적으로 따지면 일견 맞는말처럼 들린다. 그걸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의 기억을 믿는 것 뿐인데, 그 자체를 불신하게 되면 두 잔상의 차이는 없게 된다. 사내는 이런식으로 끊임없이 기억에 대해 의심한다.

[미처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기억이 되어 멀어져가는 것이다. 명명하는 것조차, 아니 의식하느나 것조차 불가능한 존재. 나는 그저 조각조각 흩어진 한 무더기의 기억에 휘둘리는 무언가이다. ... 기억이라고 이름 붙여진 나 자신의 존재의 단편들을 헛되이 모아들여 어떻게든 이어보려하는 무언가이다.] p.23

물론이다. 사람이란 기억의 조합으로 이루어진다. 기억이 없는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게 10년, 20년어치의 기억이든. 바로 순간 1,2초의 기억이든. 지금 막 잠에서 깨어난 기억상실증 환자조차 눈을 뜬 순간 본 주변 풍경을 기억으로서 가지게 된다. 그러나 그 뿐일까. 정말 사람이란 기억이란 무더기만을 산발적으로 가진 존재일까. 그렇지 않다. 사람은 그 기억을 구성하고 때론 재조합하기도 한다. 때로 기억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통제의 꼭대기에는 나 자신이 있다.

그러나 나같은 독자를 염두에 두었을까. 마지막 단편 '얼음 덩어리'에서 작가는 사람의 하드웨어가 얼마나 무력한지를 보여준다. 같은 상황을 소년과 여자의 두 입장에서 보여주고 있는 실험적인 방식의 단편이다. 매주 목요일 3시, 시립도서관 앞 커피집에 앉아있는 여자를 소년은 본다. 이내 아무상관이 없을 것 같던 여자는 소년의 뇌리에서 죽은 엄마로 대치된다. 이성적으로 불가능한 일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소년은 자신의 환상에 집착한다. 한편 여자는 소년을 연심을 품었나 의심하다 이내 불륜 상대의 아들로 규정한다. 한 번 마음 속에 내려진 정의는 뒤바뀌지 않아 그로 인해 그녀는 몇 개월을 미루던 이별을 결심한다. 이 소설에서 드러나는 상황적 요인은 단순하다. 몇 번의 우연을 가장한 마주침 뿐이다. 그러나 그 속에서 일어나는 각 개인의 심적인 동요는 복잡하다. 이성이 떠난 사람의 하드웨어는 올바르게 작동하지 않을 뿐 아니라 에러조차 알아차리지 못한다.

두 번째 단편집 '다카세가와'에서는 논리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치밀하게 묘사된 정사 장면을 보여준다. 형이상학적인 물음에서 내려와 책 속에서 현실 속의 우리를 마주하게 한다. 그러나 그 안에 담겨진 건 또 다시 기억에 대한 집착이다. 소설 속 남자주인공 오노는 밀실에서 생각한다.

[그는 여자를 안음과 동시에 지나가버린 시간 전부를 안고 싶었다. ... 그는 소설을 쓰기 전부터 오랫동안 에로스에 의한 초월이라는 주제에 대해 생각해왔는데, 그 가능성은 사실은 쾌락의 과잉에 의한 일탈이 아니라 그렇게 육체라는 이름의 시간을 접하는 것에 의해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 아닐까?] p.61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육체적 결합의 묘사에 그쳤을 이야기 속에서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끄집어낸다. 한 번 지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시간, 우리가 그걸 소유할 수 있는 건 단지 주관적인 기억일 뿐이다. 그렇기에 앞서 '청수'에서 사내는 그렇게도 허무해하고, 괴로워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카세가와' 에서 그 시간을 소유하는 또 다른 방식을 펼쳐보인다. 동시대를 겪은 상대와의 결합을 통한 시간의 소유. 순간 적나라한 정사 장면이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철학으로 보여진다.

이 책이 나올 때 '히라노가 난해한 철학적 주제와 한문체, 고전의 시대를 두루 거친 끝에 마침내 당대의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p.258)며 화제가 되었다 한다. 그러나 천재라는 말이 가져온 부담감 때문이었을까, 당대의 이야기를 이해하기에 부족했던걸까. <센티멘털> 또한 나에겐 난해할 뿐이었다. 언젠가 다시, 라는 핑계를 대며 과열된 기록을 재워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