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막 14살이 된 백인 소녀 마리아가 있다. 그녀의 생일 파티, 은쟁반에 담겨나온 생일 선물은 사람이었다. 어린 흑인 노예 꼬꼬. 자기만의 노예를 선물받은 마리아는 순수하게 즐거워할 뿐이다. 그녀에게 새로 생긴 노예는 자기 마음껏 다룰 수 있는 편리한 인형에 지나지 않는다.

 

14살 꼬마 숙녀는 매일같이 언제쯤이면 가슴이 예쁘게 바뀔까 생각한다. 좋아하는 남자애를 생각한다. 자신의 비위에 거슬리는 노예 꼬꼬를 혼내준다. 그녀의 집에 놀러온 이웃 아줌마들과 엄마는 노예 부리는 걸 낙으로 삼는다. 어느 날 마리아는 아빠를 따라 노예시장에 간다. 사람이 사람을 사고파는 일에 대해 마리아는 당연하다는 듯 바라본다.

 

<2백년 전 악녀일기가 발견되다>(내인생의책.2009)를 처음 접했을 때 의아했다. 14살 소녀를 주인공으로 한 이 짤막한 소설 어디에 악녀가 등장할까싶어서. 그러나 책에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악녀가 등장한다. 다름아닌 순진한 소녀 마리아!

 

독자들은 마리아의 일기를 읽으며 경악할 것이다. 사람을 부리는 일에 대해 일말의 망설임도, 의문도 갖지 않는 순진한 마리아를 보며. 그렇다, 아무 것도 모르기에 마리아는 후대 사람들인 우리가 보기에 피도 눈물도 없는 악녀로 전락해버렸다. 마리아는 노예들을 야단치고 때린다. 그들에게 명령한다. 그러나 특별히 그들이 미워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행동들은 우리가 이해하기에 너무도 악질이다.

 

그러나 그걸 마리아의 탓으로 돌릴 수 있을까? 책 어디에도 누구도 노예 제도에 반대하지도, 의문을 표하지도 않는다. 노예들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당연히 여기고, 주인들은 그게 진리라는 듯이 그들 위에 군림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살아온 마리아가 어떻게 자신과 그들이 같은 사람이란 걸, 속한 사회가 잘못 흘러가고 있단 걸 깨달을 수 있을까!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이 상황을 그저 한낱 이야기로 치부해버리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과거 언젠가 우리들의 모습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마리아로 대변되는 이 불편한 진실을 외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마리아와 다를 게 없다. 불편하더라도 사실을 알고, 받아들이기. 그 과정을 통해 같은 일의 재현을 막을 수 있다.

 

물론 지금 시대엔 공식적인 노예제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사람 위에 군림하고, 다른 사람을 부리며 살아간다, 지금 이 순간에도. 당장 우리가 그 모든 일을 바꿔놓을 순 없다. 그러나 과거의 잘못된 역사를 아는 순간, 우리는 세상을 바꾸는 1단계에 돌입하게 된다. 이 책이 그 과정을 돕는 앙큼한 충격요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