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또한 앨리스의 원래 이야기는 제대로 모른 채 '앨리스' 라면 토끼와 다이어리만 떠오르던 그저 그런 어른이었기에, 이 책이 처음엔 그저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한 동화로 보였다. 다소 유치하고 제멋대로다. 이 나이에 이런 걸 읽고 있다니, 괜히 한숨 쉬어보기도 했다.

 

앞뒤도 없고 인과도 없으며 결론조차 모호한 사건들이 당연한 듯이 벌어졌다. 마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라는 SF 소설을 읽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나를 마셔요' 라는 병에 든 음료(온 세상 맛난 것들은 다 모아놓은 것 같은 맛의 음료)를 마시면 키가 갑자기 작아졌다가 케잌을 먹으면 커지고 급기야 먹는 양만큼 키를 조절할 수 있는 버섯까지 등장한다. 납득이나 이해의 수준을 한참 넘어서서 이성을 초월해 관념을 우주 밖으로 날려버리는 통쾌한 설정엔 할 말을 잃었다. 역시 이런 건 이해하려 들면 안 된다. 그냥 커졌다고 하면 커진 거고, 작아졌다면 작아진거다. 그 뿐이다. 거기에 대고 왜, 어째서, 라는 의문을 던져봤자 답은 하나뿐이다. 제목 그대로, 그곳은 '이상한 나라' 니까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 것 뿐이다.

 

제일 이상한 것은 주인공 앨리스였다. '오늘은 뭐든 다 이상했으니 이렇게 이상한 게 당연한 것' 으로 받아들이는 작은 소녀의 심정을 어찌 이해할 수 있을까. 대체 이 아이의 머릿속엔 뭐가 들어가있길래... 그러다 문득, 날카로운 뭔가에 찔린 기분이 들었다. 아, 나도 정말 그저그런 어른이 되어버렸구나. 내가 예측 가능한 상상의 세계를 벗어나면 받아들이지 못하는 딱딱하고 지루한 사람이 되어버렸구나. 내가 할 수 있는 '상상' 이래봐야 결국 내 세계 안에서만 맴돌고 있었구나. 그걸 알고나니 이 책이 선사하는 무한한 자유에 젖어들어갈 수 있었다. 그토록 거침없는 상상의 자유를 느껴본 적 있었던가. 그렇게 예측불가능한 세계를 멋대로 그려본 적 있었던가. 지금껏 나의 울타리 안에서만 맴맴 돌고있던 상상의 세계가 앨리스의 손을 붙잡고 시원하게 탈출했다. 어느 새 난 앨리스의 뒤를 따라가며 같이 여행을 하고 있었다. 예측불가능한 세계를 여행하는 건 생각보다 즐거웠다. 끝나는 게 아쉬울 정도로.

 

이 작품이 단순한 동화가 아니라 당시 영국의 모습을 비꼬아 표현했다고 하는데, 마지막에 첨부된 옮긴이의 말을 읽고서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책을 읽는동안 막연하게 생각했던 건 쉴새없이 누군가의 목을 베라고 명령하던 하트 여왕과 여왕을 비웃듯이 눈앞에서 사라지곤 하던 체셔 고양이, 말끝마다 '교훈' 을 달고 다녀서 막판엔 나도 살짝 질리게 만들었던 공작부인, 정도였다. 아랫사람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성급하게 판단하는 지배자(하트여왕)에게 누구도 직접적으로 대항하지는 못하지만, 그의 곁에는 언제나 그를 비웃는 무리(체셔 고양이)가 환영처럼 떠돌아다니고, 아이(앨리스)의 곁에는 바른 말이지만 딱딱하고 지루한 말을 늫어놓는는 어른(공작부인)이 있다, 이런 뜻으로 보였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루이스 캐럴이 실제 어떤 상황을 말하고자 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이 깜찍한 동화의 진정한 가치는 그게 아니라는 건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이 이야기는 독자들을 순간적으로 황당무계한 세계로 몰아넣고 그 안에서 무한한 상상력으로 날개를 달아준다. 여름휴가에 여행을 떠나는 듯, 평소에는 느낄 수 없는 짜릿한 자유의 냄새, 상쾌한 생각의 탈출, 그것이 이 작품의 진정한 가치가 아닐까.

 

조금 아쉬운 점이었다면 번역상의 문제. 번역이 매끄럽지 못하고 다소 거칠다. 지나친 번역투도 눈에 거슬리게 띄는 편이다. 언어유희도 꽤나 많이 등장했는데, 모국어가 아닌 이상 이를 머리로밖에 이해할 수 없는 점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장벽이었다. 삽화는 상당히 독특했지만 크게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글이 너무 매력적이라 그림이 빛을 못 봤다는 느낌도 든다. 글을 읽으면 절로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질 정도였기 때문일까, 읽으면서 그림을 눈여겨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는 것 같다.

 

아이를 위한 동화이고, 동시에 어른을 위한 동화. 나에게 초등학생 정도의 친척이 있다면 같이 한 번 읽어보고 싶은 책이다. 어린 아이들은 앨리스의 황당한 사고방식을 나보다는 더 잘 이해해줄 수 있을지 기대된다.

 

 

[네이버 북카페를 통해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된 서평입니다.

본 서평은 작성자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