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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정말 오랫만에 단편의 진수를 맛보았다. 원래 뒷심을 아예 포기하고 사는 나는 한 작가의 작가성은 장편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을 우습게 보는 사람이다. 짧은 글이지만 엣센스가 담긴 글, 구질구질 늘이지 않고 인생의 어느 한 순간을 긴장감있게 드러내는 단편이 나는 좋다.

청소년기에 체호프를 읽어 보았는지 기억이 안난다. 독서를 경쟁하듯 즐겼던 시절이라 친구에게 빌려 읽었건 도서관서 대출받아 보았건 한 두번은 그의 글을 읽었을 것이다. 그런데 내용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특별히 마음을 건드릴만한 건수가 없었던 것일까... 민음사간 체호프단편선은 소중한 책임에 틀림없다. 외국어로된 소설이 이렇게 잘 번역된 것은 참 보기 힘들다. 물론 원작자의 감동적인 글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역자의 실력과 섬세한 노력이 책전체에 골고루 스며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만큼 좋은 번역이다.

’관리의 죽음’이나 ’드라마’같은 짧은 소설은 충격적이라 할 만큼 강한 인상을 준다. 단순한 모티브이건만 그 설정이 가지고 있는 무시무시한 힘은 글을 읽는 독자의 신경을 마비시키고 만다. ’관리의 죽음’에서 하찮은 실수를 침소봉대하여 급기야 마음의 병으로 숨지는 주인공이나 ’드라마’에서 자신이 쓴 희곡을 끝까지 낭독하다가 죽임을 당하는 한 여인은 마치 부조리극의 주인공들같다. 웃음은 자조적이고 씁쓸한 뒷맛을 지울 길 없다. 이 두 등장인물은 일반인이 보기에는 어리석기 그지 없지만 마치 안도현의 시 ’연탄’에 나오는 "너 언제 남을 위해 한번이라도 뜨거웠던 적이 있느냐"라고 외칠 것 처럼 보통의 우리들을 그냥두지 않는다. 어리석고 답답한 그들에게서 안타까움만 느끼는 것은 아니다.

’드라’마에서 여인의 낭독을 듣고 있는 작가의 몽롱한 상태는 아주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런 식으로 ’티푸스’와 ’주교’에서도 주인공의 의식상태와 내면이 자세히 기술된다. 근래의 다른 작가에게서도 볼 수 없는 신선함 자체였다. ’미녀’는 어린 시절 할아버지와의 여행에서 만난 아리따운 아가씨에 대한 기억이다. 그가 그녀와 말을 나눈 적도 없었지만 주변 인물들의 행동설명으로 그녀의 시선끄는 아름다움에 대해 독자를 설득시키고도 남는다. 즉 그녀가 미녀란 사실은 마부가 괜스레 말에게 욕지거리를 해대며 은근슬쩍 아가씨에게 눈길을 놓지 않는 모습이라든가 할아버지의 직설적인 칭찬을 통해 그녀의 열굴과 맵시를 열거하지 않더라도 독자에게 충분히 전달되었다. 이것이 체호프단편이 주는 맛이다.

’베로치카’는 일상의 무덤덤함에서 뛰쳐나올 용기가 부족한 한 남자를 등장시킨다. 지방에 머물면서 신세를 진 한 가정을 떠나면서 그는 뒤쫓아 와 사랑을 고백하는 여인의 호소에 마음이 움직이려 한다. 다시 찾은 그들의 집주위에서 그가 두번째 들렀다는 사실은 오로지 그 집의 개만 알고 있을 뿐이다. 다시 발길을 돌려 여인숙에 도착해 여인숙 주인의 투덜거리는 소리를 뒤로하고 짐을 싼다. 그는 스스로가 분명히 알고 있었다.

"다리에 이르자 그는 걸음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자신의 괴이한 냉담함의 원인을 알고 싶었다. 그것이 외부적인 요소가 아니라 자기안에 내재되어 있다는 점은 명백했다. 그는 솔직하게 시인했다. 그것은 영리한 인간들이 종종 과시하는 그런 이성적인 냉담함도, 자아도취적인 바보의 냉담함도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영혼의 무기력, 아름다움을 깊이 지각하지 못하는 무능력일 뿐이며 또한 빵한조각을 얻기 위한 지저분한 싸움과 독신의 하숙방 생활, 그리고 교육이라는 미명아래 얻어진 조로증에 다름아닌 것이다."

베라라는 여인의 사랑고백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의 태도는 이성적 냉담함이나 자아도취적인 바보의 냉담함이 아니라 영혼의 무기력과 조로증의 결과라는 자기시인의 독백은 독자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데가 있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마음이 바로 문학적 자세라고 감히 말한다. (그가 의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현재 우리 사회의 의사란 얼마나 자기합리화와 허영덩어리들인가. 문학적, 인문학적, 예술적 상상력이 가장 부족한 부류가 바로 의사들이다. 모르면 사랑이라도 하지 그들은 자기들만 최고인 줄알고 비아냥을 떨곤 한다. 물론 전부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한편 ’베짱이’는 예술에 무지한 의사 남편을 둔 바람기 가득한 한 여인네의 비참한 말로를 보여준다. 그러나 여기 나오는 의사는 요사이 무식한 의사들과는 다르다. 그는 예술을 잘은 모르지만 무한히 사랑하는 남자다. 그래서 그는 아내의 잘못을 나무라지 못하고 병든 몸으로 죽어간다. 착한 남편의 죽음을 방조한 아내에게는 어두운 앞날만 남아있다. 방종의 댓가와 순수한 충직함이 무엇인가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공포’에서 친구의 아내에게 집착하던 남자가 친구의 근심(공포)을 듣고 그 아내의 본심을 알고 난 뒤에 그녀와 함께 밤을 지내지만 매달리는 그녀의 청을 뿌리치고픈 마음이 들게 된다는 이야기다. 친구의 막연한 공포는 아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친구의 아내는 정작 주인공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지만 이후에 그는 감히 그의 아내를 빼앗지 않는다. 그건 그녀가 심하게 매달렸기 때문이었을 수도, 그가 친구의 마음을 헤아렸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관계를 계속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페테르부르크로 떠난 뒤 다시는 친구와 그의 아내를 만나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는 몰라도 바로 친구가 느꼈던 그 공포가 자신에게도 옮아왔기 때문이다. 그 공포의 정체는 무얼까. 우리가 자유롭다고 계속 외치는 순간에도 과연 우리는 진정 자유로운 것일까. 작가는 40명의 순교자라는 이름이 붙은 하찮은 술주정꾼의 목소리로 우리에게 묻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