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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5 기다려요. 그녀가 얼른 크기를 기다려요, 엄마. 그녀가 내 어깨에 기댈 때를 기다려요. 내가 그녀 가까이 다가가면, 그녀 입술이 떨리기를 기다려요. '자, 이제 내게로 와, 내 안으로 들어와서 널 불태워 봐'라고 말하는 것 같은 짙은 향기가 뿜어져 나오길 기다려요. 그녀한테 무를 수 없는 약속을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다려요. 둘만의 인생이 흐르는 고랑을 깊게 팔 수 있는 약속 말이에요. 환희이자 때론 비극이기도 한 그 약속. 그녀가 날 기다려 주길 기다려요, 엄마. 나한테 대답해 주길 기다려요. '좋아, 루이, 네가 준 꽃반지를 끼고 네 곁에 있을게.'

흔히들 남자는 첫사랑을 평생 잊지 못한다고들 합니다. 사랑이 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던 시절 사랑한 소녀를 말이죠. 첫 단편의 주인공인 '루이'는 평생 잊지 못할 첫사랑을 시작한 소년입니다. 수염이 거뭇거뭇 이제 사춘기에 접어든 그는 (여자인 제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분명 육체적 욕망 또한 강렬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참으로 순수한 사랑을 하는 순정남입니다. 절세미인 승리의 여신인 빅투아르라는 예쁜 소녀를요. 그는 그녀에게 자신의 사랑을, 또한 그녀의 사랑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녀가 성장하기를, 그리고 그녀가 진심으로 그를 사랑해주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지요. 그런 그의 순정이 참 애틋하고 감동적이었습니다. 그가 그의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했던대로 빅투아르에게 구혼을 할 때에는 뭉클해지기도 했구요. 하지만 여자와 남자는 같은 종족임에도 또한 매우 다른 종족이지요. 그리하여 그의 순정은 쉬이 그녀에게 전달되지 못하고 엇나가기만 합니다. 어쩌면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해 더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를일입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차차 성장해나가는, 특히 내적으로 성장해 나가는 루이의 내면이 참으로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루이와 함께 설레고, 고민하고, 성장해 가는 애틋한 감동이 짙게 배던 예쁜 작품이었습니다.

p.58 엄마는 내게 마지막 사실을 알려 주셨다. 사랑의 슬픔 또한 사랑의 한 형태라고.

p.79 남자들은 결코 뒤돌아보지 않는다. 되돌아가는 게 너무 두려워서. 여자들은 떠나는 남자 뒤를 쫓아가지 않는다. 그가 돌아오지 않을까 봐 너무 두려워서.

프랑스의 투케라는 지역은 소문난 휴양지라고 합니다. 휴양지에서 만난 사랑이란 로맨틱하기도 하지만 휴가 기간이 끝나버리고 나면 사랑 또한 끝나버리기 일쑤이지요. 두번째 단편 속 주인공은 사춘기 소녀 시절 이 투케에서 잊지 못할 첫사랑을 만납니다. 하지만 휴가지에서의 사랑이 으레 그렇듯 그는 떠나버리고 그녀는 아픕니다. 죽을만큼. 남자 운이 지독히도 없던 그녀는 후에 또 다른 남자와 만나 사랑에 빠지고 아이를 가지고 결혼을 하지만, 남편 또한 그녀와 아들 곁을 떠나버립니다. 그녀는 또다시 죽을만큼 아팠고, 실제로 죽으려고도 했습니다. 그런 그녀를 붙잡아 준 건 어머니와 아들이었지요. 사랑에 실패하고 아플 때마다 죽을 만큼 아픈 그녀는 어쩌면 아주 열정적이고 뜨거운 사람인 줄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그녀는 미처 몰랐던 겁니다. 사랑의 슬픔 또한 사랑의 한 형태라는 것을. 그리고 진정한 사랑을 위해선 이를 감내해 낼 줄도 알아야한다는 것을요. 그녀가 투케 해변에서 죽어가던 한 노인을 구하고, 어리기만 했던 아들이 사랑에 눈을 뜨게 되며 이런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이제 그녀는 사랑의 아픔을 이겨내고 새출발을 할 용기를 얻게 된 겁니다. 사랑에 실패하고 끊임없이 상심하는 그녀의 내면 묘사에 같이 아프고, 그녀의 깨달음엔 같이 힘을 얻게 되던 작품이었습니다.

p.100 나는 아들에게 사랑의 슬픔 또한 사랑이 가진 모습 중 하나라고 얘기해 주었다. 애잔한 추억 속에도 행복이 숨어 있다고. 실패한 사랑은 결코 그저 실패로만 끝나지 않는다고. 자기 자신과 상대방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는 거라고. 왜냐하면 만남이란 두 운명이 서로 닿아 감전이 일어나는 거니까.

p.120 남자들이 내가 혼자여서가 아니라 아름다워서 다가왔으면 좋겠다. 경험이 있는 여자라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여서 다가왔으면 좋겠다.

나이가 중년쯤에 접어들어 갱년기가 지나면 부부 사이엔 으레 권태기가 찾아옵니다. 세번째 단편의 주인공은 권태기에 빠진 중년 여성입니다. 불같이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이내 육아에 지치고 아이들도 다 키워 떠나 보내고 나면 찾아오는 권태. 그런 공허 속에서 모니크는 자신 안의 열정을 다시 찾길 바라며 모니크이길 버리고 루이즈가 되어 투케로 떠납니다. 그리고 바에서 우연히 만난 한 남자 로베르. 둘은 금세 불같은 사랑에 빠지지만 모니크...아니 루이즈와 로베르는 유부녀이며 유부남입니다. 매디슨카운티의 다리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었지요. 저는 사실 이 명작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제가 감성이 메말라서인지 모르겠지만 어찌되었건 그들이 말하는 사랑이란 결국 불륜이란 생각 밖에 안들었거든요. 그래서 주이즈와 로베르의 한때 소나기 같은 사랑에 조금 거부감이 일기도 했습니다. 물론 루이즈가 갖는 권태라는 걸 충분히 이해는 했지만 말이지요. 그런데... 이 단편의 엔딩은... 웃음 짓게 만드네요. 참으로 발찍하고 깜찍한 엔딩에 저도 모르게 껄껄 웃어버렸습니다. 루이즈의 새로운 사랑을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p.159 우리가 처한 비참한 현실이 서로를 끌리게 만들었다. 첫눈에 불꽃이 튀지도, 심장이 벌렁거리지도, 책 속의 로맨틱한 대사 같은 것도 없었고, 오직 눈빛만 주고받았다. 필사적인 눈빛. 우리는 서로의 눈빛에 매달렸다.

2차 세계대전의 혼란 속에 만난 남녀가 있습니다. 둘은 사랑에 빠졌고 이 전쟁통에서 함께 살아남든다면, 언젠가 죽을 때도 함께 죽자고 약속을 합니다. 그러나 비정하기만 한 전쟁은 둘을 갈라놓았고, 그들은 4년만에 재회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사랑에 빠지지요. 결혼을 하고 4년 전 했던 약속을 지켜가며 50년의 세월을 서로 지극히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유명한 예언가가 인류 종말을 예언했던 1999년 7월 그들은 다시 투케를 찾습니다.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가끔 영원하고 완벽한 사랑은 어떤 것일까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그것은 남녀가 죽도록 사랑하다가 마지막도 함께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결국 이뤄지기 힘들고, 때문에 역시 영원하고 완벽한 사랑은 없는 것이라는 결론도 내렸구요. 그런데 로즈와 피에르는 그 완벽하게 영원한 사랑을 이루었습니다. 그런 그들의 사랑이야기는 몹시 감동적이었고, 세상에 절대 없다고 믿었던 영원한 사랑이 어쩌면 실재할지도 모른다는 희망도 갖게 되었습니다.

p.174 사랑의 속삭임이란 격동과 파란을 겪어 보지 못한 사람들이나 누릴 수 있는 말이었다. 세상은 미래를 약속하는 말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런 말들이 더 비집고 들어올 자리가 없었다. 그저 계속 함께 있어 왔고, 앞으로도 근심과 믿음, 소박한 희망을 안고 함께 인생을 살아가는 게 사랑의 전부였다.

이렇게 네 편의 단편들은 각각 독립적인 이야기를 담으며 각기 다른 연령대의 사랑 이야기를 보여주어 우리 인생, 그리고 사랑을 돌아보고 점쳐보게 하는 기분이 들게 합니다. 게다가 전혀 다른 이야기인 듯 한 각각의 이야기는 긴밀한 연결고리를 갖고 하나의 이야기로 아울러지는 독특한 구성을 취합니다. 거기에 작품 말미에 각각의 단편들에 대한 짧은 에필로그들을 덧붙이기도 합니다. 이런 구성 덕에 각각의 이야기에서 얻은 감동들이 나선형을 그리고 깊고 넓어집니다. 인간을 행복하게도, 슬프게도, 아프게도, 즐겁게도 하는 것. 그리하여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 것은 역시 '사랑'이라는 새삼스런 깨달음을 얻은 잔잔하고 깊고 아름다운 이야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