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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인류의 출현은 전혀 반가운 것이 아니다. 생물 중에서도 가장 늦게 지구에 출현한 인류는 똑똑한 머리를 사용해 어느새 다른 종의 우두머리 노릇은 물론 지구의 주인행세를 하고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세상에서 가장 겸손하지 못하며 동시에 가장 사악한 종이 바로 인간이란 종이 아닐까란 생각이 날이 갈수록 짙어진다. 나도 인간이면서 말이다.

나는 최근에 요즘 상영중인 영화 <지구가 멈추는 날>의 예고편에서 아주 인상적인 대사를 들었다. 키아누 리브스(영화에서는 멀쩡한 인간외모에도 불구하고 외계인 ‘클라투’란다)가 한 여자에게 하는 말이다. “지구가 죽으면 당신들도 죽소. 인류가 사라지면 지구는 살 수 있어.” 이 문장을 보는 순간 나는 소름이 끼쳤다. 정말로 이 지구가 우리 인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이 영화를 아직 보지 못해서 줄거리를 먼저 살펴보았는데 꽤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그런데 주위에서 영화를 본 사람들의 반응이 대체적으로 실망스러웠다는 것이다. 인류 때문에 지구가 멸망할 수도 있다는 내용의 영화가 전혀 흥미를 끌지 못했다니 도대체 사람들은 그럼 영화를 그저 장면만 보기 위해서 본다는 것인가. 그 영화의 메시지는 별로 중요치 않은가 말이다. 같은 인간이지만 정말 이해하기 힘든 사람들 많다.

여기 위 영화 속 외계인 클라투같은 역할(인류에게 지구멸망의 위험을 미리 알려주는 것)을 하는 한 작가가 있다. 마거릿 애트우드. 그녀는 <인간 종말 리포트>라는 소설로 현 인류에게 경고를 보내고 있는 셈이다. 그녀의 작품은 <시녀 이야기>이후 이번이 두 번째인데 첫 작품이 너무 인상적으로 남아 작가 이름만 보고 이 소설을 냉큼 집어 들게 되었다. 물론 소설 제목에도 무척 흥미가 가긴 했지만.

무인도를 그려놓은 듯한 표지에는 이상하게 생긴 동물들만 보일 뿐 인간이 보이지 않는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그림은 자연스럽고 평화로워 보인다. 작가의 리포트가 꽤 두툼하다. 이정도 분량의 리포트라면 내용이 꽤나 세세할 것 같다. 내가 리포트에 점수를 주어야 하는 입장이라면 나는 몇 점을 줘야하는지를 염두 해 두면서 책을 읽어야 할 것만 같다.

리포트 요약분 : 눈사람(지미)는 크레이크(글렌)와 오랜 친구이다. 그들이 사는 조합이란 곳은 눈부신 과학의 혜택을 받는 곳(공상과학영화나 만화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최첨단 도시를 떠올리면 될 것 같다.)으로 평민촌 사람들과는 사는 방식자체가 다르다. 천재 과학자인 크레이크는 파라디스라는 연구소에서 자신의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친구 지미를 스카우트 한다. 크레이크는 인류에게 젊음을 유지할 뿐 아니라 최고의 쾌락까지도 제공하는 ‘환희이상’이란 알약을 만드는 동시에 완벽한 유전자들로만 이루어진 ‘크레이커’란 존재도 만들어 낸다.

한편 지미와 크레이크가 어린 시절 음란사이트에서 본 여자 아이가 어느새 어른이 되어 파라디스에 이들과 함께 산다. 그녀의 이름은 오릭스. 지미가 오랫동안 사랑해온 여자이자 크레이크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여자이다. 그녀는 새로운 존재인 크레이커들에게 삶에 필요한 것들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크레이크가 개발한 알약을 직접 판매하기도 한다. 그런데 어느날 그 알약을 복용한 사람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이상 증상을 나타내며 죽어간다. 이런 와중에 살아남은 건 지미와 크레이커들 뿐. 그리고 온갖 동물(몇몇의 인간 생존자들을 포함)들이 다이다.

<인간 종말 리포트>의 보고서에 따르면 결국 살아남은 인간은 천재 과학자들이 아니라 눈사람이라 불리는 평범한 사람 지미였다. 그리고 인간을 닮긴 했지만 인간이라 부르기에는 석연찮은 크레이커와 동물들만이 살아남았을 뿐이다. 여기에서 드는 의문 하나. 왜 하필 오릭스나 크레이크(이 책의 원제는 ORYX AND CRAKE)가 아니라 지미가 살아남았을까?

소설에서 오릭스와 크레이크는 자신이 저지른(알게든 모르게든) 일이 벌어지는 것을 보고 괴로워해 결국 죽음을 자초한 것처럼 그려진다. 살아남은 완벽한 인간에 가까운 크레이커란 존재에게는 지미보다는 오릭스나 크레이크의 생존이 더 도움이 되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크레이커들에게는 고마운 생존자일지 모르나 같은 인간이나 동물들에게는 결코 반가운 존재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것이 지미가 살아남은 이유는 아니었을까? 하지만 지미 역시 크레이커들을 위해 같은 인간을 죽이거나 동물들을 죽였다. 어쩌면 지미조차 살아남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작가가 그려내는 인간 종말의 과정은 대단히 현실적이다. 유전자 조작이니 임상실험이니 하는 것들은 지금도 알게 모르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들이다. 이 소설이 섬뜩한 이유는 바로 인간의 멸종을 가져오는 원인이 인간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기존에 익히 보거나 들어왔던 대재앙이나 외계생물체와 같은 외부적 요인이 아니라 인간의 두뇌와 의지에 의해 인간이 종말을 맞는다는 주제는 눈부신 과학의 발달에만 미쳐있는 현 인류에게 따끔한 일격을 가하고 있다.

또한 지미와 크레이크가 심심풀이로 찾는 사이트를 보고 있노라면 이것이 곧 우리의 현실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게임들을 보면 이것이 곧 닥칠 인간 혹은 지구의 미래인 것만 같다. 이런 요소들 때문에 이 소설을 그저 공상과학소설만으로 생각할 수가 없다. 지금도 버젓이 행해지고 있는 과학계의 현실을 자꾸만 생각나게 하는 소설 속 이야기들을 보면서 과연 이 소설의 결말처럼 되지 말란 법이 있겠는가 싶다.

이 소설대로 인간이 멸종하게 된다면 이 지구와 지구 위의 생물체는 아마도 축제를 벌일지도 모른다. 뛰어난 두뇌 하나만 믿고 자신들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생명체도 무시해 버리는 잔인한 종.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지구와 지구상의 생물들은 인간의 종말만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거라 생각하면 섬뜩하다.

재앙이든 외계생명체든 그것들로 인한 지구나 인류의 멸망을 그리는 영화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고 또 이 소설과 같이 눈부신 과학으로 인한 인간의 종말을 이야기하는 책들이 나오고 있는 지금의 시점에서 단순히 이런 것들을 오락물로만 여기지 말고 이들을 통해 진지하게 자신들에게 현재의 인간의 위치를 되물어봐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이 시점에서 아무런 죄책감이나 두려움없이 더 나아가 버리면 정말로 인간은 다른 종이나 지구와는 함께 살아갈 수 없는 그런 날이 오고 말지도 모른다. 지구나 다른 생물들은 인간없이 살아갈 수 있지만 인간은 그들 없이 홀로 살아갈 수 없다는 걸 똑똑한 인간들이 왜 이리 모른 척만 하고 있는 건지 그저 답답할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오릭스와 크레이크는 더 이상 구제가 불가능한 인간들에게 지구가 보낸 ‘환희이상’알약과 같은 존재일지도...

이 <인간 종말 리포트>는 주제는 물론 소재 또한 참신하고 매우 논리적이며 설득력이 있다. 점수로 준다면 100점 만점에 95점을 주고 싶다. 5점이 깎인 이유는 아주 사소한 이유이다. 굳이 이 리포트를 2권으로 나누어 제출할 필요가 있었나 하는 점이다. 요즘은 600페이지가 넘는 소설책도 많이 보이던데 약간의 상술의 냄새가 풍긴다는 점에서 5점을 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