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주체할 수 없는 열정과 이제는 그 열정을 식혀야만 한다는 슬픔도 시간이 흐르면 사라질거야’ 얼마전 우연히 과거의 일기장을 뒤적거리다 눈물 자국에 번져 겨우 읽을 수 있던 문장이었다. 그당시 내게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저런 문장을 쓰면서 눈물까지 흘렸을까. 과거를 더듬어 보지만 마음을 심난하게 하는 기억은 떠오르지 않는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명문장임을 새삼 깨닫는 순간이다. 이별의 고통, 어긋난 사랑에 대한 슬픔, 그리움과 기다림의 미련도 결국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것을 몸소 익혔기에 ‘시간이 약이다’란 말은 적어도 나에겐 그저 그런 가벼운 말장난이 아니다. 단순한 이 문장은 그 어떤 명언이나 격언보다도 나를 가장 크게 위로해주는 완벽한 진리이다.

여기 나 말고도 시간이 약이라는 진리를 알고 있는 여자가 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프랑수아즈 사강’이다. 사강은 소설 <한 달 후, 일 년 후>에서 시간 앞에서는 사랑도 덧없음을 ‘조제’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가 그녀에게 그들의 사랑에 대해 말하자, 그녀는 그에게 사랑의 짧음에 대해 말했었다. “일 년 후 혹은 두 달 후,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알고 있는 사람 중 오직 그녀, 조제만이 시간에 대한 온전한 감각을 갖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격렬한 본능에 떠밀려 시간의 지속성을, 고독의 완전한 중지를 믿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그 역시 그들과 같았다. (p. 136~137)

<한 달 후, 일 년 후>에 등장하는 9명의 남녀들은 제각각의 사랑을 하고 있다. 아내 니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제라는 여자에게 열정을 쏟는 베르나르, 자기와 너무나 닮은 베르나르를 좋아는 하지만 연하남 자크에게 사랑을 느끼는 여자 조제, 긴 시간을 파니와 부부로 지내왔지만 베아트리스에게 마음을 빼앗긴 채 망가져가는 알랭.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라면 사랑도 목적이 되는 여배우 베아트리스에게는 세 명의 남자가 있다. 자신을 그저 멀리서 바라보며 애태우기만 하는 유부남 알랭, 시골에서 갓 올라와 그녀에게 첫눈에 반해 맹목적으로 사랑을 퍼주는 연하남 에두아르, 그리고 그녀의 야망을 눈치채고 접근하여 그녀의 애간장을 녹이는 후원자 졸리오.

이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한다. 사랑을 그 누가 똑부러지게 정의내릴 수 있겠는가. 사람 수만큼이나 다양한 사랑의 모습에서 결국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사랑은 나의 사랑뿐이다. 내 사랑을 받아줄 그 사람의 사랑조차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이란 이름의 현주소이다.

사랑에 있어 변치 않는 속성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기심이다. 사랑을 시작하고 끝내는 것 그리고 지속하는 것. 그 모두는 내 이기심에서 출발한다. 상대방을 위해서라는 말을 덧붙여도 결국은 나를 위해 움직이는 것이 사랑이다. 그리고 이런 사랑은 시간이란 단짝을 곁에 두고 자신의 유한함을 위로받는다.

한 달 후면 이 열정이 식을까. 일 년 후면 이 미련도 사라질까. 지금의 나로썬 하루 후도 짐작할 수 없다. 하지만 매일매일은 켜켜이 쌓여갈 테고 점점 쌓여가는 시간 속에 지금의 사랑도 그 모습을 바꿀 것이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사강의 사랑 이야기는 삼류영화에서나 소재로 쓸 법한 뻔함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사랑 이야기에는 꾸밈이 없어 가슴깊이 다가온다. 로맨틱하지도 않고 아름답고 행복한 결말도 아니지만 그래서 더 예리하게 파고드는 사랑의 속성을 무시할 수가 없다.

그녀의 소설을 통해 사랑을 다시 한 번 직시해 본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사랑의 한 달 후 모습, 일 년 후 모습을 떠올려 본다. 그리고 누구를 위한 사랑인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내 사랑에 억지스러움은 없는지, 나의 이기심은 얼마만큼 자리 잡고 있는지, 그리고 과연 이 사랑도 시간이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인지...

 

(기억에 남는 문장)

정말로 자기 자신을 바라볼 시간이 있는 사람은 결코, 아무도 없다. 대부분의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눈(目)을 찾는다. 그것으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기 위해. (p. 77)

알랭 말리그라스는 베아트리스와 처음으로 단둘이 만나 시간을 보낸 뒤, 다시 그녀를 만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 정도로 그와 다른, 그 정도로 폐쇄적인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p. 113)

열정이란 삶의 소금이며, 열정의 지배 아래서는 사람은 소금없이 살 수 없다는 것-열정이 존재하지 않을 때는 너무나 잘 할 수 있는 일이지만-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p. 113)

"나리, 이 사실을 아셔야 해요. 여자에게 시간은 아주 중요해요. 지나가버린 시간도 때로는 아직 의미가 있죠. 하지만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은 전혀 의미가 없답니다.“ (p. 1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