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다가온 화창한 봄날 주말의 나른한 오후, 몇 백 권의 책들을 둘러보다 꺼내 책 <쿨하게 한걸음> 서른두살의 봄을 설레임도 없이 맞는 나에게 왠지 힘을 실어줄 것 같은 제목이 마음에 쏙 들었다. 게다가 책 띠지에 적힌 한 문장. ‘내 인생, 그래도 아직은 괜찮아!’ 보자마자 주책맞게도 찡해지는 코끝과 눈물이 핑~~도는 눈가... 그렇게 글썽글썽한 마음으로 읽어내려 간 책. <쿨하게 한걸음>

주인공 연수는 서른세살이다. 서른두살 크리스마스이브에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다니던 회사마저 그만둔 백수이다. 정년퇴직을 한 아버지와 갱년기를 맞은 어머니, 한참 직장생활에 빠져있는 여동생이 그녀의 동거인들이다. 오래전부터 만나오던 5총사 친구들이 있고 참견하기 좋아하는 고모, 이쁜 외모로 시집 잘 가서 아이들 낳고 잘 사는 사촌 연재가 그녀의 삶에 가끔씩 등장하는 조연들이다. 그리고 백수 생활을 하게 되면서 다시 만나게 된 대학동기 동남. 그녀의 서른셋 인생은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초라하지도 않은 평범함 그 자체이다.

# 삼십대, 너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거지?

그에 비해 삼십대는 뭐랄까. 별로 열고 싶지 않은 문이 저 혼자 열린 느낌이다. 궁금한 것도 없고 할 수만 있다면 그 문을 도로 닫고 싶은 심정이다. 삶의 무게를 혼자 짊어져야 하고 시소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한다. 이십대에는 더 이상 자란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도 없을 만큼 스스로 성숙하다고 느끼지만 삼십대에는 좀더 성숙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p. 22)

나는 서른두살이다. 그래도 아직은 삼십대 초반이라 이십대에 가깝다고 나 자신을 위로하지만 오히려 그런 위안이 더욱 나를 진정한 삼십대로 만든다는 걸 안다. 성취감이 느껴질 정도로 이루어 놓은 것이 없어도 이십대는 사랑스럽기만 했었는데 이제는 나름 치열하게 살아간다고 생각하는데도 매일매일이 두렵기만 하다.

정말 할 수만 있다면 삼십대의 문을 닫고 싶은 심정이지만 이런 마음이 강해질수록 남은 삼십대는 오히?직 삼십대를 맞을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도 시간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로 하여금 삼십대의 계단을 꼬박꼬박 하나씩 오르게 한다. 나는 아직 삼십대 너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 삼십대 싱글녀로 살아간다는 것

엄청난 사람을 바라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런지 모르겠어. 그냥 잘생긴 것도 아니고 돈 많은 것도 아니고 호감가는 사람 말이야. 그런 사람을 찾는 건데. 정말 그런 사람들은 죄다 결혼을 했거나 애인이 있거나 아니면 여자를 싫어하는 거냐고. (p. 41)

연수의 친구 희주가 한 이 말을 보는 순간 내가 보인 반응은 딱 한가지다. ‘맞아 맞아’라며 고개를 연신 끄덕인 것. 난 그렇게 대단한 남자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나와 비슷한 사람. 내가 바라는 건 그것 하나뿐인데 왜 그런 남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건지. --;; 그리고 이사람이다 싶으면 왜 죄다 임자가 있는 건지. 이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미스터리한 일이고 풀기 어려운 숙제이다.

삼십대에 싱글로 산다는 것은 외면과 내면이 일치하지 않는 걸 스스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 앞에서는 독신주의라고 큰소리치지만 혼자 먹는 저녁밥상 앞에서는 저절로 눈물이 뚝뚝 흘러내리는 것을 주체하지 못하는 여자. 이 모습이 삼십대 싱글녀로 살아가는 여자의 모습이자 바로 나이다. 이런 나를 나라도 사랑해 줘야 하는데... 그것마저 쉽지가 않다.

# 삼십대, 진정으로 나를 발견할 수 있는 특권의 시간

그런 면에서 나는 그동안 자신에 대해 너무 무지했다. 무관심하고 무신경했다. 세상을 향해 뻗어 있는 안테나를 조금만 더 나를 향해 집중시켰더라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길로 가기를 원하는지 좀더 일찍, 그리고 분명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p. 115)

회사를 그만둔 연수는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 관련 일을 하기 위해 공부하면서 생애 최초의 ‘자발적 학구열’을 경험한다. 나, 이 단어의 의미를 100% 이해할 수 있으며 200% 공감하는 바이다. 지금 내가 바로 ‘자발적 학구열’에 불타 조금은 느슨한 주경야독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제야 내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나니 이것저것 배우고픈 마음에 몸이 힘든 것도 웃으며 참아낼 수 있다.

다만 내가 마음의 소리를 왜 좀더 일찍 듣지 못해 길을 빙빙 돌고 돌아왔는지 그것이 조금은 후회가 된다. 하지만 조금 늦게 깨달은 만큼 좀 더 큰 열정을 갖게 되었다는 것.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삼십대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자 축복이 아닐까 한다. 삼십대가 되어서야 나는 나를 향해 안테나를 돌릴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너무 이르지도 그렇다고 너무 늦지도 않는 나이에만 제대로 작동하는 안테나. 나는 그 특별한 안테나를 지금 나를 향해 집중시켜 놓은 채 맞춰진 채널을 놓치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있다.

# 나, 너와 진정으로 화해하고 싶어

죽음은 산 사람들에게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장례라는 긴 의식을 통해 그런 자리를 마련한다. 사실 나도 나 자신과 그다지 원만한 사이는 아니다. 싸움과 냉전과 불만과 후회가 끊이지 않았다. 한때는 뻗어나가는 고민과 이상을 현실이 따라가지 못했고, 때로는 현실에 안주하느라 아무것도 꿈꾸지 않았다. 언제나 이게 아닌데, 좀더 나은 삶이 있을 텐데,라고 중얼거리지만 하루하루 시간을 때워가기 바빴다. 그러고 나면 분노와 자괴감이 치밀었다. 그러면서도 이런 보잘것없는 삶마저 전복될까봐 두려웠다. 그러다보니 나와 화해할 틈이 없었다. 자기 자신과 사이좋게 지낼 수 있다면 삶은 꽤나 평화로울 것이다. (p. 244)

시골에서 고생해가며 공부시킨 아들이 서른세살이 다 되도록 직장을 갖지 못한 것에 분노하는 아버지. 그리고 결국 이런 아버지를 저버리고 죽음을 선택한 동남은 연수의 대학동기이자 뒤늦게 백수생활에 접어든 그녀와 밥을 같이 먹던 밥친구이다.

친구 동남의 죽음 앞에서 산다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연수의?? 내 모습이기에. 과거의 모습이라고 말하기에는 나는 여전히 내 자신을 진정한 친구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화해를 하지만 그것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큰 소용돌이는 물론 작은 파문에도 금세 터져버리고 마는 비누방울 같은 나와 나의 관계.

나도 이제는 평화를 누리고 싶다. 멀리 있는 타인들이 아닌 바로 나 자신과 함께 누릴 평화. 그래서 오늘은 큰맘 먹고 나에게 화해의 악수를 청할 예정이다. 우리의 화해를 일기장에 각서로 써놓고 관계가 흔들릴 때마다 읽고 또 읽으며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리하여 평화에 길들여진 마음으로 나의 사십대를 맞을 것이다.

# 여백투성이인 삼십대를 위하여

나의 봄날은 여백투성이였다. (p. 247)

이 한 문장에 용기를 얻는다. 여백투성이 봄날. 여백투성이 인생. 여백이 주는 쓸쓸함과 휑함에 기죽어하기 보다는 주어진 여백을 채워나갈 희망으로 이 봄날을 맞고, 남은 삼십대를 맞자고 다짐해 본다. 그리고 남들보다 좀 덜 채워진 여백이면 또 어떠랴. 남들 눈에는 텅 빈 여백으로 보이더라도 나에게는 깨끗한 투명색의 향연으로 보인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겠는가.

주인공 연수가 삼십대여서 일까, 싱글이어서 일까. 연수의 행동과 생각은 마치 내 마음속의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 보고 있자니 안쓰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대견하기도 하다. 슬프다고 펑펑 울지도 못하고 기쁘다고 크게 웃지도 못하며 아프다고 엄살도 제대로 부릴 수 없는 어정쩡한 삼십대를 살아간다는 것이 조금은 힘에 겨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내 인생을 통틀어 이렇게 많은 것을 생각하고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시기이자 내 선택으로 내 남은 인생을 바꿀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를 삼십대를 나는 사랑할 것이다. 힘들다고 회피하지는 않을 것이다. 부딪쳐보고 또 부딪쳐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