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높고 견고한 벽 앞에 한 남자가 서 있다. 뒤쪽에서 비추는 빛으로 인해 벽에 그림자를 그린 채 서있는 남자는 빛조차 넘어갈 수 없는 벽 앞에 맨발로 선 채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고백의 제왕』이라는 제목과는 다르게 표지의 남자에게서는 제왕의 포스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금이 갔어도 오랜 세월을 단단히 견뎌온 벽이 제왕다운 포스를 뿜어내고 있는듯하다. 간만에 보는 인상적인 북디자인이다.

『고백의 제왕』은 인상적인 표지만큼이나 수록된 8편의 단편도 강한 인상을 주는 글들이다. 표지의 벽 뒤쪽에서는 분명 존재하지만 반대쪽에 선 남자에게는 결코 명확하게 인식할 수 없는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 하지만 뚫어지게 벽을 쳐다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희미한 그 존재를 느끼게 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그것이 바로 『고백의 제왕』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동경소년>은 일본의 허름한 호텔에서 만난 한 남자의 고백에 관한 이야기이다. 유끼라는 이름을 가진 일본 여자친구의 존재감을 찾아주기 위해 함께 일본으로 온 남자. 그러나 끝내 유끼는 희미해져간다. <변희봉>은 자신과 식물인간인 채로 병상에 누워있는 아버지만이 알뿐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변희봉을 자꾸만 마주치게 되는 남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르마딜로 공간>은 몇 십 년의 세월이 교차되는 공간에 대한 이야기이며 <기차 방귀 카타콤>은 죽은 아내와 함께 카타콤을 찾아 나선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곡란>은 시골의 허름한 여관에 출몰하는 유령에 관한 이야기이며 <밤을 잊은 그대에게> 역시 자신이 죽은 것을 모르는 존재들이 인간의 삶 속에서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이장욱의 소설에는 이렇듯 실체를 분명히 알 수 없는 존재들이 실체를 가진 척하며 말을 하고 모습을 드러내며 인간과 함께 한다. 누군가는 분명히 그 존재를 느끼지만 그 외의 대다수 사람들에겐 전혀 실존하지 않는 존재들. 만지고 볼 수 없던 존재들은 뚫어지게 자신을 응시하고 관심을 갖는 누군가의 앞에 그 존재를 들키고 만다. 아니 일부러 드러낸 것일지도 모른다. give and take든 동병상련이든 유유상종이든 이유야 어찌되었든 분명한 것과 분명하지 않는 것이 어느새 교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벽 앞에 서 있는 남자는 벽이라는 장애, 이성 혹은 고정관념을 뛰어넘어 벽 너머의 존재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분명치 않는 존재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인가. 나는 바로 벽 앞에 서 있는 남자에게 주목한다. 홀로 맨발을 한 채 서 있는 남자의 모습은 <동경소년>의 ‘나’와 <변희봉>의 ‘만기’, <아르마딜로 공간>의 ‘남자’ 그리고 <기차 방귀 카타콤>의 ‘당신’, <곡란>의 ‘김상태’를 떠오르게 한다. 벽 앞의 남자는 의지없이 타성에 젖어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백수이고 달뜬 열정 하나로 소질도 없는 연극을 하기 위해 사표를 쓴 빚쟁이 이혼남이며 변두리에서 그렇고 그런 인생을 살아가는 하찮은 부류의 인간이다. 또한 아이를 사고로 잃고도 평상시와 같이 생활을 하다가 결국 아내마저 저세상으로 보낸 샐러리맨이고 외진 곳에서 시원찮은 여관을 운영하는 남자이다. 보이지 않는 커다란 벽에 둘러싸인 채 갈 곳을 잃어버린 사람들 혹은 거대한 벽에 의해 희망을 거세당한 사람들. 그들이 바로 실체없는 존재를 느끼는 사람들이다. 분명하고 명확한 세상에서는 더 이상 뭔가를 바랄 수 없는 사람들에게만 보이는 불분명한 존재는 그들에게는 그 나름의 묘한 위로인 것이다. 이러한 독특한 위로는 표제작인 <고백의 제왕>에서도 엿볼 수 있다.     

<고백의 제왕>은 고백만 했다하면 고백을 하는 본인보다 정작 그 고백을 듣는 타인에게 더 큰 파장을 일으키는 곽에 관한 이야기이다. 중학교때 폐경을 한 식당 아주머니와 첫경험을 하였다는 고백에서부터 자신의 누이를 자살로 몰고 갔다는 고백이며 아버지를 칼로 찌른 적이 있다는 고백까지 곽의 고백은 그저 좀 심한 뻥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듣는 이들에게 정신적 충격을 주는 진정성이 느껴진다. 친구들은 그런 곽을 멀리하려 하면서도 결국은 그의 고백에 끌려들어간다.

곽의 친구들은 곽의 충격적인 고백을 들을 때마다 그를 점점 멀리하지만 그 각각은 곽과 따로 만나며 차마 남들 앞에서는 하지 못했던 고백을 서슴없이 풀어 놓는다. 한마디로 곽은 친구들의 마음을 여는 고백이란 형태의 마법 열쇠를 가진 사람인 것이다. 또다른 자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고백’을 이용해 센 놈을 친구들 앞에 툭 던져놓고는 친구들의 마음속 응어리로만 남아있던 고백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이다. 

차창에 비친 곽은 어둠속에 잠긴 채 소리없이 앉아 있었다. 문득 내 얼굴에 곽의 얼굴이 스르르 겹쳐 보였다. 곽이 사라지고 내 얼굴만 차창에 남았을 때, 나는 고개를 돌려 옆자리의 곽을 보았다. 곽이 그 유령 같은 얼굴을 돌려 나를 돌아본 것도 그때였다. 우리의 눈이 마주쳤다. 무언가 고백을 시작하려는 듯, 곽의 입술이 열렸다. 나는 곽의 벌어진 입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것은 검고 깊게 뚫린 동굴 같았다. 차창 바깥으로는 끝도 없이 눈이 내리고 있었다. (p. 113)

자려고 불을 끄고 나면 어김없이 들리는 소리들. 빛이 존재하는 동안에는 결코 들을 수 없었던 정체불명의 소리는 어느새 하나의 형체를 이루며 어두운 방안을 서성인다. 어느날에는 그 소리에 너무 민감한 나머지 졸음마저 달아나고 의식이 점점 또렷해지는가 하면 어느날에는 위치를 짐작할 수 없는 곳에서 나는 검은 소리로 인해 혼자가 아님을 느끼기도 한다. 두려운 동시에 위로도 되어주는 존재. 『고백의 제왕』은 바로 그런 존재들에 관한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