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펼치고 첫 몇 장을 읽어 내려 가자마자 어? 이건? 빨간머리 앤?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주인공 레베카는 갈색 피부에 두갈래로 땋은 검은 머리, 그리고 반짝이는 눈동자를 가진 열 살의 소녀로 서니브룩 농장의 미망인 랜들 부인의 7남매 중 둘째딸이다. 첫 페이지에서 레베카는 코브씨의 마차를 타고 리버보로의 소여자매네 집으로 가는 중이다. 마차를 타고 가면서 과묵한 코브씨 옆에 앉아 쉴새 없이 재잘대는 레베카는 어린 동생들을 돌보며 지냈던 농장에서의 가난하고 고달펐던 생활과 결혼안한 두 분의 이모가 원하는 말없고 얌전한 한나언니 대신 자신이 리버보로에 가는 기회를 얻게 된 사실을 털어놓는다. 원하지 않던 아이가 와서 이모들이 자신을 거부하면 어떡하나 걱정하는 레베카. 여기까지만 봐도 영락 없는 빨간머리 앤이란 생각이 드는데 그런 생각은 책을 읽어나갈수록 더욱 굳어진다. 두 분의 이모 중 큰이모인 미란다 이모는 깐깐하고 엄해서 마릴라 아주머니를 연상하게 하고 제인 이모는 내성적이지만 마음씨가 따스한 매슈 아저씨를 떠올리게 한다. 게다가 리버보로에서 레베카는 빨간머리 앤에서 앤의 절친한 친구 다이애나와 같은 존재인 에마 제인을 사귀고 언제나 붙어 다닌다. 아, 그리고 시 낭송! 레베카는 앤처럼 시 낭송을 무척 좋아한다. 그리고 리버보로를 떠나 웨어햄의 샹급학교로 전학을 하고 레베카의 밝고 진정한 모습에 점점 마음을 열어 받아들이는 미란다 이모, 그리고 레베카를 돌보아 주던 두분 이모의 투자 사정이 나빠지는 점, 결국 미란다 이모는 쓰러져 돌아가시게 되는 점 등은 누가 뭐래도 빨간머리 앤이다.

 

그런데 더욱 웃긴 건 내가 제목에도 쓴 것처럼 이 책에는 키다리 아저씨의 존재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리버보로에서 지내던 레베카가 같은 반 친구(너무도 가난한)를 돕기 위해 에마 제인과 함께 이웃 마을로 비누를 팔러 갔다가 애덤 래드라는 엄청난 부자 아저씨를 만난다. 팔고 있던 비누를 몽땅 사준 아저씨에게 레베카는 알라딘씨라는 별명을 붙여준다. 이 때 레베카는 열 살이고 애덤 래드는 스물아홉 살이다. 이후 알라딘씨는 해마다 크리스마스때면 레베카와 에마제인에게 선물을 보내주고 늘 레베카를 지켜본다. 웨어햄 학교의 이사장이기도 한 알라딘씨가 열살 난 꼬마아가씨에서부터 열여섯 살 된 아름다운 숙녀로 자라나는 레베카를 지켜보는 모습은 영락 없는 키다리 아저씨란 말이다.

 

아,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역자 후기를 보니, <서니브룩 농장의 레베카>가 <빨간머리 앤>보다 5년 먼저 미국에서 출간된 작품이란다. 힝, 루시모드, 그럼 당신은 이 책을 읽었나요? 아무래도 읽은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역자도 인정한 것처럼 생김새와 감정이 풍부한 성격, 거기에 레베카가 처한 상황까지 어쩜 이리 앤과 흡사할 수가 있단 말인가. 아니, 이젠 앤이 레베카와 흡사하다고 해야하나. 이렇고 보니 어릴때부터 오랜 세월 빨간머리 앤을 사랑한 한 사람으로서 괜히 정말 레베카가 먼저 나왔나, 하는 어깃장을 놓는 마음까지 생긴다. 만약 루시모드가 이 책을 읽고 빨간머리 앤을 만들어냈다면 레베카의 작가인 케이트 더글라스위긴이 많이 억울하긴 했겠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건 레베카보다는 앤이 좀더 사랑스럽고 인상적인 존재라는 점이다. 차라리 처음부터 레베카카가 앤보다 먼저 씌여진 작품이란 걸 알고 읽었다면 의구심과 선입견 없이 좀더 즐거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기억하고 싶은 글귀 하나

 

아름다운 프록코트를 입으면 예의 바르고 우아하게 행동하게 된다는 걸 아는 사람, 눈을 감거나 손뼉을 치거나 고개를 숙일 때 마음속에 존경의 감정이 생긴다는 걸 아는 사람 그리고 미워하는 사람에게 매일 예의 바르게 행동하려고 노력하면 거부감이 조금씩 녹아 없어진다는 걸 아는 사람이라면, 외적인 행동과 태도가 내적인 생각과 감정, 영혼의 변화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p7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