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뉴스에 우리나라에서 한 해에 출간되는 책이 4만여권인데(상상했던 것보다 엄청나다. 내가 혹시 잘못 들었나 싶을 만큼) 그 중에서 판매되는 책의 대부분은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른 책들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사실 나도 책을 고를 때 리뷰나 후기가 많이 달린 책을 우선순위로 하게 되고 결국 그 리뷰나 후기도 광고에 많이 노출되거나 베스트셀러인 책들에 많이 달리니까 역시 나도 안전빵인 베스트셀러를 거의 찾게 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볼 때 베스트셀러라고 할 수는 없을텐데 웬지 모르게 내 마음을 끌어당기는 뭔가가 있었다. 주인공인 엘링과 키엘이 슈퍼마켓에 가는 것조차 식은땀이 흐르는 공포 체험인 사회부적응자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 역시도 그러하니까.

 

 나는 엘링이나 키엘처럼 요양원에 강제입원될 정도로 심하지는 않지만 어렸을 때부터 나의 내성적인 성격은 `병적'인 것과 `성격'의 경계선상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었다. 길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단 몇 마디의 인사를 나누는 것이 너무나 떨리고 두려워 상대방이 나를 알아보기 전에 먼 길을 돌아서 가곤 했던 나. 지금 중년의 나이가 되어서도 아파트의 이웃들과 마주치게 될까봐 땅만 내려다 보며 길을 걷는 나. 그 덕분에 5년을 살아도 아직 아래 윗집 사람들의 얼굴조차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나. 하다못해 중학생, 초등학생인 아들과 딸아이의 친구들을 만나도 어떻게 인사를 해야할지 심장이 떨리는 나.

 

그런 나를 남들은 어떻게 볼까. 아마 건방지고 재수없다고 하겠지. 가뜩이나 쭉 째진 눈에 한 성질 하게 생긴 얼굴이니... 남편조차도 이런 나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한다. 게다가 아들녀석까지 이런 내 성격을 닮았으니, 그야말로 보통 사람들에게는 이런 우리들의 모습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비난의 대상일 뿐이다.

 

나도 상상을 한다. 이웃들을 만나면 밝고 건강하게 인사를 나누고, 남들 앞에서도 웅얼웅얼 모기소리가 아니라 당당한 큰소리로 내 의견을 표시할 줄 아는 모습을.

 

책 속에서 나와 똑같은 심정을 토로한 엘링의 대사를 보고 얼마나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공감을 했던지.난, 엘링과 친구가 되어버렸다!

 

`부당한 일을 겪은 후, 그 때 그 자리에서 했어야 하는 말들을 조목조목 정리하느라 골몰했던 밤과 낮이 그 얼마나 많았던가.'

 

게다가 소심하지만 생각이 깊고 똑똑한 엘링의 다음 고민은 비단 나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한 번쯤은 해봤을 게다.

 

` 나는 제발 인생이 한 번으로 그치길 바랐다. 환생만 생각하면 마음이 늘 무거워졌다. 나는 삶이 유난히 힘들다고 느껴질 때에는 죽음의 단계를 혼자 그리워하기도 했다. 깊고 영원한 잠. 하지만 저승에서 만난 천사 혹은 영적인 지도자가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차면서 내가 이번 생에서 불합격했다는 소식을 알려주는 건 더 큰 절망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어쩌면 다음 생에서는 르와다에서 시작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엘링과 키엘은 사회부적응자로 요양원에서 한 방을 쓰던 사이다. 둘은 이제 시에서 마련해준 오슬로의 한 주택에서 사회복지사 프랑크의 보호와 지대한 간섭하에 `사회성 트레이닝'을 받고 있다. 시에서 받는 생활보조금으로 방구석에서만 생활하던 두사람은 프랑크의 닦달에 못이겨 집 밖으로의 첫 발을 내딛게 되고, 집에서 기를 고양이를 얻기 위해 신문 광고를 보고 낯선 사람의 집을 찾아가거나 동네 식당에서 요리를 시켜먹는 등 일반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매일 해나가는 평범한 일상을 대견하게 시도한다. 정말이지 내 가슴이 조마조마하기도 하고, 뿌듯해지기도 한다!

 

하나씩 둘씩 사회화 훈련에 적응해 나가면서 어느 날, 키엘에게 병원 청소부로 일하면서 바람둥이에게 차인 레이둔이라는 여자가 다가오고, 키엘은 무뚝뚝하고 여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숙맥이지만(엘링도 키엘과 마찬가지로 여자의 손 한 번 못잡아본 동정남이다. 서른이 훌쩍 넘도록!) 특유의 우직함으로 여자를 지켜준다. 레이둔이 이미 다른 남자와의 관계를 통해 임신을 한 상태였지만 그것은 키엘과 엘링에게는 전혀, 아무 문제거리도 되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어땠을까. 다른 사람의 아이를 가진 여자와의 관계라면 이러쿵 저러쿵 말도 많고 탈도 많고 생각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엘링과 키엘의 순수한 영혼이 아기를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는 자세는 가히 경이롭다.

아마 내 아기를 가진 남자들의 기쁨과 호들갑은 저리가라다.

 

그리고 이들의 인생에 나타난 또 한 사람, 노시인 알폰스. 사실 알폰스는 키엘이 여자와 처음으로 단둘이 식사를 하던 날, 살짝 토라진 엘링이 얼떨결에 자신은 선약이 있다고 내뱉은 바람에 무작정, 그러나 무진장 어렵게 찾아간 시 낭송 행사에서 만나게 된 사이지만 그와의 만남은 그에게 전혀 낯설지 않고 오히려 영혼까지 잘 통하는 친구를 만난 듯한 친밀감까지 느낀다.

 

엘링과 키엘은 말할 것도 없지만 병원 청소부가 직업인 레이둔과 가족도 없이 혼자 외롭게 지내는 노인인 알폰스도  우리 시대의 아웃사이더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 네 명의 아웃사이더들이  만나면서 이어지는 사건과  따뜻한 이야기들은 무덤덤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일상 속에서 작은 것에도 감사하게 하고 가슴 뭉클한 감동을 전한다.

 

그리고 조금씩조금씩 사회에 적응해 나가면서 당당해져가는 엘링과 키엘의 모습은 나에게 그 무엇보다 힘이 되는 무언의 용기를 북돋워 준다. 고마워요. 엘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