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침침한 일본 추리소설들 사이에 동그마니 놓여있는 연분홍 표지의 작은 책이 눈에 들어온다.
<냉정과 열정사이>의 작가 에쿠니 가오리의 신작소설이다. 책은 대개 좋아하는 작가이거나 기대되는 줄거리이거나
흥미가 도는 제목일 경우 읽거나 사게 된다. 이 책은 그중 가장 단순한 경우인  ’예쁜 표지에 혹해서’이다.
예쁜 표지에 혹해서 책을 들고보니, 꽤나 믿음가는 작가인 경우 나의 예리한 눈길에 스스로 감탄하는데
이 책을 골라놓고선 감탄이 심했나 보다. 옆에 있던 아들녀석이 ’에고~’하며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옆 서가로 
가버릴 정도였으니. ^^

외국계 회사에 근무하는 사토시와 테디베어 작가인 루리코는 결혼 3년차 부부이다.
<달콤한 작은 거짓말>은 사토시와 루리코 부부의 결혼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부부의 냉정과 열정에 관한 
이야기라 해도 어색하지 않다.
루리코는 남편 사토시를 ’성실하고 온화한 사람’이라 하고 
사토시는 아내 루리코를 ’화를 내지 않고 소란스럽지 않은 사람’이라 한다.
그는 정해진 시간에 귀가를 하고, 그녀는 빈집에 남편이 홀로 들어서는 일이 없도록 언제나 먼저 기다린다.
그녀는 숙제검사 받는 아이처럼 하루일과를 그에게 보고하고, 그는 자신의 일과를 보태어 감흥없는 대꾸를 한다.
여가시간에 방문을 걸어잠그고 게임을 몰두하는 그와 거실에 남아 테디베어의 얼굴을 만드는 그녀의 일상은
평화롭지만 뭔가가 비어있고 허전하다. 결핍을 눈치챈 독자에게 그녀는 얘기한다. 

"이 집에는 사랑이 부족한 것 같아"

평온이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부부의 겉모습과는 달리 그들은 서로에게 들리지 않는 비명을 지르는 중이다.

 

얼간이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얼간이처럼 혹은 찰스 디킨스 소설의 주인공처럼. 
루리코가 만든 베어 중 하나처럼.

사토시가 베어에 흥미가 없다는 건 나도 안다. 
그렇더라도 베어가 아니라 나에 대한 의리든 애정이든 관심이든 제스처든 뭐로든 간에 
한번쯤은 들여다보러 와주어도 좋지 않은가.

사랑이 부족한 집, 얼간이처럼 보이는 곰인형, 의리없는 남편이라 해도 사토시와 루리코의 중심은 결혼생활이다.
기필코 지키리라 악다구니를 쓰지도 않고, 무관심에 질려하며 뛰쳐나가지도 않는다.
그저 지켜야 할 약속을 지키는 것처럼, 그곳에 마침 집이 있으니 돌아가는 것처럼 부부는 살아간다.
그런 그들에게 각자의 연인이 생기고, 배우자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묘한 기쁨과 열정을 느낀다.
하지만 연인에게 "나, 네 몸이 목적인지도 몰라"라고 고백하는 루리코처럼
’작은 시냇물같은 시호의 쾌활함만 있다면 루리코의 섬세함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토시처럼
그들에게 연인은 배신이라기보다 수액이라 느껴진다.  
서로를 져버린 추한 배신이 아니라, 서로를 지켜내기 위해 불가피하게 공급되는 수액.
이는 분명 작가가 가진 문체의 힘이리라. 열정임은 분명하나 냉정을 잃지 않는 열정.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준영은 연애지상주의자로 결혼을 꿈꾸지 않는다.
결혼지상주의자인 연희는 최고 조건의 남편과 열정적인 연인을 동시에 꿈꾼다.
유부녀가 된 연희를 밀어내는 준영이 ’냉정’을 맡았다면, "들키지 않을 자신있어"라고 말하는 연희의 역할은 ’열정’이다.
준영의 ’냉정’과 연희의 ’열정’이 일관성있게 드러나지만, 영화는 시종 연희의 열정에 휩싸인다.
흥미롭지만 위태롭다.
그에 반해 사토시와 루리코의 이야기는 냉정이 주도한다.
애틋함은 없지만 불안하지 않다.
’연연하지 않는다’라는 감정의 깔끔함을 표현하는 단어로 쓰이기전 ’쿨하다’의 원래 의미는 ’시원하다, 서늘하다’이다.
이야기는 내내 쿨하다. 개의치 앉는 쿨함을 넘어 서로에게 서늘하다. 서늘하다 못해 점점 얼어붙는 그들에게
거짓말일지라도 달콤함이 필요할 만큼.

"왜 거짓말을 못하는지 알아? 사람은 지키고 싶은 사람에게 거짓말을 해, 혹은 지키려는 사람에게"라고 루리코는 연인에게
소리친다. 그리고 금세 생각한다. ’절망에 실체가 있다면 지금 이 방에 있는 것이 그것이리라’고.

루리코가 진정 지키고 싶은 건 무엇일까?
사토시가 진정 계속하고픈 사랑은 누구와 일까?
감정에 휘둘려 끈적거리지 않는 또 한편의 에쿠니표 사랑이야기다.

달콤한작은거짓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