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독서 위주의 독서를 해온 줏대없는 독자라, 덴마크 태생의 작가라고는 ’한스 안데르센’ 밖에 떠오르는 인물이 없다.
인물 외에 떠오르는 게 있다면, 아기 미끄럼틀에 혹해 2년동안 쉼없이 마셨던 우유 정도.. 잠시 실없는 소리를...^^


미국에 거주하는 덴마크 출신작가가 쓴 아일랜드 배경의 소설이라니, 얼마나 다양한 정서가 배어있을 까 자못 궁금하다. 
필자는 한 인터뷰에서 덴마크도 미국도 아닌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삼은 이유를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넘나드는 
독특한 분위기가 이야기를 살리는 데 가장 적합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며 넘나들고,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고 독자의 심장을 앗아갈 치명적이고도 아름다운 유혹에 관한
이야기라.... 늦은 밤 커피 한잔을 곁에 두고 누르스름한 스탠드 불빛 아래서 책장을 넘긴다.

아일랜드의 한적한 바닷가 마을에 ’여자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허튼 분위기가 아니라, 순수하게 섹시한 분위기를 풍기는’ 
스스로를 짐이라 소개한 남자가 등장한다.  아일랜드에 단 한대 밖에 남지 않은 새빨간 경주용 오토바이를 탄 그의 등장에
고요했던 바닷가 마을이 술렁이기 시작한다. 샤너시 즉 이야기꾼인 짐은 저녁이면 동네의 작은 선술집에서 달콤한 목소리로
신비로운 이야기를 시작한다. 마을의 여인들은 자석에 이끌리는 쇳조각 마냥 저절로 선술집에 모여든다.
긴장감 넘치는 그의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며 혹은 숨이 멎을 듯 매혹적인 그의 눈길을 기대하며.

미젠헤드에서 켄마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여자들로 하여금 자기 남편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잊게 만드는 눈길이었다.

그리고, 첫번째 비망록의 주인공 피오나는 그와의 첫만남을 이렇게 회고한다.

애초에 내가 근사한 오토바이를 탄 잘생긴 청년을 보지 못했더라면 우리는 모두 여전히 
코크 주 서부의 우리집 침대에서 안락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중략>
눈길 한번으로 그는 마치 금고인 양 나를 부수고, 내 안의 모든 것을 훔쳐갔다.

더블린 근교의 한적한 주택에서 집주인 모이라와 두 젊은 여자 피오나와 로이진이 변사체로 발견된다.
오랫동안 감금된 생활을 하다 처참한 죽음을 맞은 두 자매와 누군가와의 격렬한 싸움 끝에 죽임을 당한 
모이라는 이모와 조카 사이다.  한때 모이라는 부모를 잃은 조카에게 평안과 안식의 존재였으나, 짐이 등장하면서
그들의 평화는 무참히 깨진다.  마을 여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녀들 역시 짐의 치명적인 매력에 빠져든다.
그리고 짐의 주위를 감도는 불길한 기운을 감지하게 된다. 어느 여인은 불길한 기운의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어느 여인은 매혹적인 짐을 얻기 위해  슬금슬금 파멸의 길로 들어선다.

비극이 시작되기 전 미지의 인물은 자매에게 친절하게 경고한다.
하지만 자매가 그 경고를 떠올리는 때, 죽음의 사신은 검붉은 잇몸을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그녀들 머리 맡에서.

이야기꾼들은 자기들 속내만 빼고 무엇이든 다 보여줍니다. 아시겠죠. 그들은 당신의 신뢰를 얻고,
또 모든 이야기가 당신을, 오직 당신만을 위해 만들어진 양 느끼게 하지요. 그들을 믿지 마세요.
만일 그 친구가 당신에게사랑에 대해 말하면, 젖먹던 힘까지 내서 도망치세요.

죽은 자매가 남긴 비망록, 샤너시 짐이 들려주는 늑대왕자의 전설과 우체부 니알의 뜻밖의 여행.
이 세가지 이야기가 단 1밀리미터의 침범도 없이 평행선처럼 나란히 진행된다.
죽은 자매의 이야기에 안타까워하고, 늑대왕자의 탐욕에 몸서리쳤으며 니알의 스스슥 스케치소리에 차례로 귀기울일 수 있다.
’몸을 굽혀 종이에 바싹 귀를 기울이면 불길한 짐승이 소곤거리는 경고를 들을 수 있을 것’ 같고 
몸을 기울여 벽에 바짝 귀를 붙이면 몽롱한 자매의 이야기소리가 들릴 것 같은 필자의 글은 영화를 보여주듯 선명하다. 
파멸, 격정, 유혹을 모두 가진 짐과 그의 위험천만한 유혹에 맥없이 빠져드는 여인들의 자극적인 이야기가
어슴푸레한 밤안개가 어울릴 듯한 신화의 나라, 중세기사의 나라 아일랜드와 조화를 이뤄 묘하고 독특하면서도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로맨스와 스릴러의 완벽한 조합이라 해도 좋겠다
커피 한잔을 새로 만들어 오느라 접어둔 페이지를 황급히 펼치는 나 역시, 짐의 유혹에 넘어간게 분명하도다.

’나쁜 남자’에 흔들리는 여인들이여,
더블린 여인들의 <달링짐>을 알게 된다면 흔들리는 자신을 서둘러 추스리고 싶어질 것이다.
마치 금고인 양 그대를 부수고 그대 안의 모든 것을 훔쳐가기 전에.

달링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