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KBS ’도전 골든벨’을 시청하고 있었다. 골든벨 문제에 도전할 수 있는 49번 문제로 기억한다. 
청소년의 고민과 방황을 그린 샐린저의 작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었고 정답은 <호밀밭의 파수꾼>이었다. 
분명 익숙한 작품이었지만 내게 익숙한 건 그저 제목 뿐이었는지 줄거리를 듣고도 전혀 떠올리지 못했다. 
문제를 풀던 학생이 답을 맞췄는지는 기억에 없다. 그 학생의 정답여부를 떠나서 나의 무지함을 깨닫는 일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런 작품들이 꽤 된다는 사실은 더욱 충격이었다. 
퀴즈 프로그램에 나가 골든벨에 도전할 일은 없겠지만 제목만 있고 내용은 없음인 텅빈 주머니같은
 내 머릿속 문학작품들의  주머니는 좀 채워야겠다.


<문학의 숲을 거닐다>는 지금은 고인이 된 서강대 영문과 장영희 교수의 문학에세이며 필자는
 ’문학전도사’라고 불릴 만큼 대중이 영문학 작품을 친근하게 접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한 분이다. 
조선일보 북칼럼에 실린 글을 모아 펴낸 <문학의 숲을 거닐다>에는 60여 꼭지에 달하는 작품이야기가 실려있다. 
한 꼭지당 한편의 주연급 작품을 소개하고 있지만 감자줄기처럼 줄줄이 딸려있는 조연작품들까지 센다면 
책 한권에 100여편의 작품을 담고 있는 셈이다.

 필자는 영문학교수로서 작품을 분석하기 보다는, 그 작품이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해주었는지에 대한 
솔직하고 편안한 이야기를 하겠노라 다짐한다. 어린 시절, 얇은 습자지를 대고 그림을 베껴가며 빠져들었던 
<신데렐라>도 엄연히 영문학작품이고, 고입 연합고사를 마친 겨울방학, 아랫목에 엎드려 손바닥이 샛노래지도록 
귤을 까먹으며 읽었던 브론테자매의 <제인에어>나 <폭풍의 언덕>도 영문학작품임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영문학작품하면 내가 감히 읽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톨스토이의 <부활>이나 카뮈의 <이방인>이 
먼저 떠오르며 머릿속이 와글거리는 소음으로 가득해진다. 그런 내게 필자의 프롤로그는 감사할 따름이다. 

 단지 하나의 독자로서 그 작품이 내 마음에 어떻게 와 닿았는지, 어떤 감동을 주었는지, 
그래서 그 작품들로 인해서 내 삶이 얼마나 풍요롭게 되었는지 솔직하게 쓰려고 노력했다. 
’문학의 숲’이라는 칼럼의 제목처럼 내 마음 속으로 들어온 이 책들이 무성한 숲에 
주렁주렁 달려있는 열매가 되어 내게 어떤 찬란한 향기와 양식이 되었는지 전달하고 싶었다.

 이 세상에서 필자가 알고 있는 모든 작가의 이름 중 가장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이름이라는 데 
전적으로 동감하며 필자에게 간택된 첫 주인공 ’라이너 마리아 릴케’에게 빠져든다. 
처음 접한 필자의 글은 따뜻한 봄바람에 흩날리는 연분홍 벚꽃잎처럼 곱다. 
휑했던 내 머릿속 릴케의 주머니가 고운 시로 채워진다. 
곧이어 생텍쥐베리의 주머니가 <어린왕자>에 대한 친절하고 명료한 해설로 채워진다. 

며칠전 5학년인 아들녀석이 아침독서시간에 <어린왕자>를 읽겠다고 학교에 가져갔다. 
돌아온 아이에게 "어린왕자 어땠어?"라고 묻자 다 읽기는 했는데 마지막이 좀 이해가 안된다고, 
어린왕자는 지구에서 뭘했으며 왜 다시 자기별로 돌아갔는지 모르겠단다. 
요즘 아이가 심취해있는 책이 과학수사에 관한 책이니, 얼마나 기승전결이 분명하겠는가? 
선문답같은 <어린왕자>가 이해될리 없겠다. 그날 밤 잠들기 전, 쉽고도 명료한 해설이 인상적이었던 
필자의 <어린왕자>편을 들려주었다. 아침에 읽었던 내용을 떠올리는 듯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경청하던 
아이가 결론을 내렸다. "아! 그러니까 어린왕자의 포인트는 여우랑 장미꽃이구나"하고.
 포인트 어쩌고 하는 단어가 우스웠지만 어쨌거나 5학년 아이는 필자의 글을 들으며, 작품의 핵심을
 완벽하게 파악한 셈이다. 초등생마저도 쏙쏙 이해가 될만큼 쉽고 편안한 글을 쓰는 필자가 부러워서 샘이 날 즈음, 
필자의 한숨소리가 들리는 듯한 고백 한 줄을 읽게 되었다. 허나 솜씨없는 이 독자에겐 그의 한숨이 
안타깝기 보다는 엄살로 느껴지니, 시샘이 제대로 난 모양이다.

 

시 뿐만 아니라 작가들의 전기를 읽어 보면 극심한 내적 고통을 겪고 난 후 영혼의 깊은 상처를 
승화하여 주옥같은 작품들을 쓰는 예가 허다하다.
그러나 영혼도 영혼 나름인지, 험한 세상 이리저리 부대끼며 살면서 내 영혼도 상처투성이지만 
아름다운 진주 같은 작품은 커녕 이 짤막한 글 하나 쓰는 데도 어젯밤 잠을 설쳤으니,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한숨지을 뿐이다. 

   때로는 감동적인 이야기와 때로는 가슴아린 이야기와 때로는 웃음이 픽 터져나오는 이야기와 
짝지어진 문학작품은 먼 나라의 오래된 이야기가 아닌 내 이웃의 혹은 나의 이야기인듯 친근하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이렇게 쉽고도 간결하게 분석한 글이 또 있을까?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마치 영화 한편을 보는 듯 선명하게 그려낸 글이 또 있을까? 
그리고... 5학년 아들녀석이 가장 좋아하는 <안네의 일기>를 이토록 거룩하게 그려낸 글이 또 있을까? 

 

나는 세계가 차츰 황폐해 가는 것을 보고 수백만의 고통을 직접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늘을 보면 언젠가는 모든 일이 다 잘되고 이 잔악함도 결말이 나고, 
또다시 평화와 고요가 오리라고 믿습니다. 그때까지는 어떻게든 이상을 잃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어쩌면 정말 그것들을 실현할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르니까요.
                            - 1944년 8월 1일, 안네의 마지막 일기 중 -

   주옥같은 글이라는 표현을 대신할 만한 재주가 내게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영문학 작품들이 필자에게 무성한 숲에 주렁주렁 달려있는 열매가 되었다면 
필자의 작품은 나의 엉성한 문학의 숲에 주렁주렁 달려있는 보석이 되었다. 
훗날로 미뤄둔 <데미안><파우스트><햄릿>은 이제 영영 읽을 수 없는 건가 하는 생각에 필자의 부재가 새삼 슬프다. 
연구실 창 너머로 하얀 소금처럼 쏟아지는 눈송이를 뒤로 한채 얼음같이 냉혹한 백지의 도전에 맞서고 있을 필자의
비장한 표정이 눈에 그려지는 듯 한데, 도전자를 잃은 텅빈 백지가 처량해 보인다. 
부디 행복하시길....

장영희, 문학의숲을거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