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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전, 시에라리온 소년병 이스마엘 베아의 <집으로 가는 길>이라는 책을 읽었다.
이미 시에라리온 내전의 참상을 알고 있었기에, 참혹하고 잔인하고 말도 안되는 현실을 직접 확인하고
싶지 않아서 책을 두고도 한참동안 읽지 못했다.
- 난 평화로와, 전쟁은 그들만의 일이잖아... 하는 이기심이 한몫했겠지.
책은 잔인함보다는 슬픔과 무기력함으로 가득차있었다. 잔악함이 극에 달한 소년병이니 그들은 그 전쟁의
가해자인 셈이다. 적어도 책을 읽는 동안만은 그들을 원망하고 증오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그 시절,
그 나라에 태어난 죄말고 무엇을 누구를 원망해야 하는지 알수 없었다. 단지 총을 들었을 뿐 그들 역시
누구보다도 참혹했기에.

<망고 한 조각>이라는 책에 대한 소개글을 읽었을 때, 도대체 이 책은 무슨 각오를 하고 읽어야 하나싶어
역시 주저했다. 가해자라고 할 수 있는 소년병의 이야기마저 마음 아프고 가슴으로 이해가 되는 데,
진짜 피해자인 소녀의 이야기는 어떤 마음의 준비가 필요할까 싶었다.

<망고 한 조각>은 시에라리온 시골마을에서 자라던 마리아투라는 열네살 소녀가 온몸으로 겪어낸 전쟁의
상처와 극복에 관한 이야기이다. 어느날 마을에 들이닥친 반군은 마을 사람들을 죽이고 집을 불태운다.
반군은 마리아투를 살려주지만, 정부에 대한 선거를 하지 못하도록 두손을 자른다. 마리아투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그때 손을 잃었다. 피와 눈물로 범벅이 된 처참한 모습의 마리아투는 필사적으로 탈출한다.

태양이 떠오를 때까지 나는 내 앞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걸었다. 반군이 점령하지 않은 마을에
곧 닿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한발 한발 쉼 없이 내디뎠다.
하지만 아주 작은 소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랐다. 올빼미가 울어대거나 나뭇가지가 딱 부러지면
소름끼치는 장면이 절로 떠올랐다.

수풀 속 어디에선가 반군이 숨어 지켜보고 있는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당장이라도 눈앞에 나타나 죽일 것
같은 절망감이 마리아투를 짓눌렀지만 그녀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저 달아나는 일 밖에 없다.
좁은 오솔길, 막다른 길에서 그녀는 비로소 사람을 만난다. 사람의 모습을 한 돌덩어리같은 괴물이 아닌,
사람의 모습으로 따뜻한 심장을 지닌 진짜 사람을. 그가 마리아투에게 건네준 건 망고 한조각 뿐이었지만,
단물이 뚝뚝 떨어지는 망고 한 조각은 그녀의 몸와 마음에 영양과 용기를 준다.

사지를 벗어난 마리아투는 도시의 병원에 도착해 치료를 받게 되고, 그과정에서 임신이라는 또 하나의 절망이
자신에게 새겨져있음을 알게된다. 두 손을 잃은 열네살 소녀에게, 성폭행으로 인한 임신이라니,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더이상 잃은 게 없다는 말처럼, 마리아투가 더이상 잃을 게 없을 만큼 절망의 바닥에 떨어졌을때 비로소
희망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마리아투는 구호단체의 도움으로 외국에서 공부하고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고
영국으로 떠나는 날 아침, 마리아투 고모가 말한다.

돌아보지 마라, 마리아투. 그래 봤자 후회와 아쉬움만 남을 뿐이니까. 항상 앞만 보고 가도록 해

영국에서의 짧은 생활을 정리하고 마리아투는 캐나다로 이주해, 제대로된 삶을 준비한다. 미래에 대한 확신과
용기가 생겨나지 않을 때, 손도 없는 아프리카 여자애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의심스러울 때마다 시에라리온 출신
카디는 진심으로 격려해준다.

너에게 손은 없지만, 정신이 있잖아. 네가 최선을 다하면 세상으로 향하는 길이 열릴거야

책을 읽으면서 내내 마음 아프고 안타까웠지만, 가장 조마조마했던 장면은 마리아투와 이스마엘이 만나는 때였다.
서두에 언급한 바 있는 <집으로 가는 길> 의 주인공인 이스마엘은 소년병 출신이다. 소년병에 의해 두 손을 잘리고
인생의 모습이 달라진 소녀가, 소년병을 만나는 것이다. 이스마엘의 홍보담당자가 필자에게 걱정섞인 목소리로
물었단다. "마리아투가 이스마엘에게 원하는 게 뭘까? 그녀에게 이런 짓을 한 소년병을 대표하여 사과를 받으려는
것일까?" 하고. 이 질문에 마리아투는 이렇게 답한다.

지금 내가 그들에게 뭘 할 수 있겠어요?
설사 그들이 내 앞에 있다 해도 내가 그들에게 뭘 할 수 있을까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건 용서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거지요.

따뜻한 봄날 밤, 마리아투의 예쁜 미소는 방안에 앉아 있던 모두를 무장 해제시켰다.
마리아투는 현재 토론토의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으며, 유니세프 특사로 북아메리카 전역을 돌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지독한 아픔을 준 전쟁이 그녀에게 새 인생을 선물했으니 그녀의 아픔은 헛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에게 희망은 커녕 한숨만 내쉬게 만드는, 재주도 없고 힙합리듬에 맞춰 흥얼거리기나
하는 그저그런, 두손을 가진 평범한 소녀의 삶보다 낫다 말할 수 있을까?

4천원짜리 커피 한잔을 기분전환삼아 마시고, 손바닥만한 와플조각에 부담없이 몇천원을 지불하는 좀 사는 나라의
기성세대로서, 적어도 몇번은 글로벌 어쩌고를 주장했던 사람으로서, 마리아투의 삶이 그저 부패하고 가난한 나라에
태어난 네 탓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진정한 글로벌의식이란 온 세상을  따뜻한 눈으로 돌아보는 것이니 말이다.
겨우 상처를 털어낸 마리아투가 글로벌이라는  품 안에서 진심으로 행복하길 바란다.

망고한조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