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살이 된 남자아이의 방문을 열면서 노크라는것을 할 줄을 모른다.

무턱대고 내가 편한시간에 아무렇지않게 문을 쓰윽 열고 들어가는것이 별로 이상하다고

생각하지않을만큼 대책없고 무개념인것이다. 반면 딸아이의 방에 들어갈때는 똑똑 가볍게

두번 문을 두드리고 문을 연다.물론 발을 들여놓자마자 딸아이의 푸념이 새어나오지만

"도대체 안에서 대답이 없는 상태에서 들어올거면 노크는 왜 하는건데?"일단 노크를 하라고

했으니 하는 시늉은 내는것으로 했는데 [동정없는 세상]을 읽다보니 이제 함부로 아들녀석

방문을 밀고 들어오는짓은 하지말아야겠구나 하는 짧은 다짐이 스쳐간다.

코밑의 수염이 듬성듬성 삐죽삐죽 솟아있는것을 보고 면도할때가 되었다고 면도기를

사주면서도 아직까지 소년의 이미지로 본다기보다는 아이의 이미지로 아들녀석을 봤었는데

엄마인 내눈에나 그렇지 조선시대에 태어났으면 기생 월매의 딸 춘향이를 꼬셔내서

깊은 밤 저고리고름을 푼 몽룡이보다 한살이나 더 먹은 어른인 셈이다.

발칙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머릿속에 온통 "한번 하자"생각밖에 없는 수능을 끝낸 준호와

견주어도 겨우 두살밖에 차이가 나지않는 열일곱..사회에서는 네다섯살은 가볍게 친구가

되는 판국이니 두살정도는 가볍게 뜀뛰기로 넘겨버릴수 있는 나이이기도 한것같다.

언제인가 "자네도 야동을 보나"하는 물음에 쿨하게 본적있다는 대답을 들은 이후에도 잠시

아들녀석이 살짝 부담스러워보이기는 했는데 준호와 아들녀석을 오버랩시켜보니 헉..

[동정없는 세상]에 나오는 캐릭터중에 준호도 참 매력있는 캐릭터였지만 숙경씨나

서영이 캐릭터또한 쉽게 만나볼수 없는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어려서부터 준호는 엄마인 숙경씨와 외삼촌인 명호씨 셋이 사는 모습에 익숙해져있었다.

가끔은 명호씨의 담배를 훔쳐서 피는것이 일상이 된것처럼, 흉허물없이 지내는 세가족의

모습은 밖의 사람들이 흔하게 생각하는 결손가정의 모습과는 달랐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의 수만큼 다양한 형태의 가족들이 존재하는것이 당연한대도 불구하고

규격에 맞춘것처럼 구색이 맞지않으면 일단 결손가정이라는 색안경을 쓰고 바라보았지만

엄마 숙경씨의 지론에 의해 없는것이 이상한것이 아니라는 것으로 받아들인 준호.

하지만 가끔 드라마에서 나오는것처럼 부자아버지나 누군가 준호를 찾아오는 꿈을

꾸기도 하는데 미처 자라기도전에 살포시 그 꿈의 싹을 살포시 밟아주는 명호씨가 있어

준호의 망상은 멀리까지 가지않는다..

 

그집아이..요즘에는 엄친아라는 말로 대변되지만

이책이 나올때는 엄친아라는 말대신 그집아이라는 말이 대세였던 모양이다.

이번에 개정되기는 했지만 이책이 처음 출판된것이 2001년이니 바뀐것이 하나둘이었을까.

일단 담배값부터 시작해서 시대의 변화를 느낄수있는데 이상한것은 그런 변화의 조짐만

읽힐뿐 사춘기아이들의 내면은 별로 거슬리지않고 지금 아이들과 맞물려 읽을수

있다는 점이다. 오래된 영화를 보면 어쩐지 촌스러운 느낌이 팍팍 드는데 정말 잘만들어진

영화의 경우에는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촌스러운 느낌보다는 좋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것과 마찬가지로 이책 또한 지금 읽어도 전혀 어색하지않은 좋은 느낌이 먼저든다.

 

잘나가는 그집아이가 남도 아니고 하필 사촌이라서 스트레스를 무진장 받고있던 영석이

그 사촌을 준호에게 소개시켜주었고 준호는 그렇게 서영이와 사귀게된다.

영석이와 함께 어울리는 무리인 경식이가 지들말로는 여자경험을 했다고 한 이후로

준호의 발칙한 상상은 점점 더 현실에 무게를 두고있는데..지들이야 여자가 없으니 그렇다

치고 준호에게는 보기만 해도 이쁜 여자친구인 서영이 있으니 지들보다 한수 위인것이고..

일단 서영이를 보기만 하면 "한번 하자"고 졸라대는 이 준호녀석을 어떻게 해야하나..

준호가 한번 하자고 할때마다 싫다고 내빼기 바쁘던 서영이 어느날 갑작스런 오케이를 하고

기분에 들뜬 준호는 서영이와 함께 드디어 그 거사를 치를 생각에 들떠있는데..

 

서영이라는 캐릭터가 참 매력적으로 다가온것은 눈만뜨면 한번 할 생각에 들뜬 준호에게

휘말리지않고 자기 주관이 뚜렷하다는데 있었다. 보통 남자친구를 사귀게 된 여자아이들의

경우 남자친구가 한번하자고 해서 얼결에 경험을 했다는 경우를 많이 들을수 있었는데

상황에 떠밀리지않고 자신의 판단에 따라 그 경험의 유무를 결정하는데 있었다.

아직 사랑이라고 표현하기엔 이르지만 섣불리 발을 들여놓기는 겁이 나고 그렇다고 자꾸만

재촉하는 준호에게 계속 거부의사를 밝히는것도 그렇고..그런데 서영이 준호와 나누는

대화들을 보다보면 생각이 참 예쁘게 정리된 친구라는것이 보여서 좋았다.

 

그리고 준호와 서영이라는 캐릭터 못지않게 큰 비중을 차지하는것이 바로 준호의 모친인

숙경씨라고 볼 수 있다. 준호를 갖고 준호를 낳는것이 가장 큰 인생의 목표였기에

준호가 태어나서 여태껏 예쁘게 자란것이 효의 전부라고 말하는 헤어디자이너 숙경씨에게

준호의 대학입학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준호가 행복하게 사는것..

그런데 부모가 되면 그 본질을 잊게되는 경우가 많다. 자식이 행복하기를 바라는것과는

조금 다르게 부모의 허영과 만족도 일정부분 채워주기를 기대하는 부분이 생기는것이다.

그런면에서 본다면 숙경씨의 저 모습이야말로 내가 가장 닮아야하는 부분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처음부터 끝까지 머릿속에 한번하자는 발칙한 생각만으로 가득차있어도

준호가 불량하거나 불편하게 다가오지않은것은 엄마인 숙경씨와의 관계때문에 그랬던

면도 많은것 같다. 삼촌인 명호씨의 말에 조언을 얻어 이제 자신이 갈 방향을 조금씩

진지하게 생각해가는 준호는 마지막까지 실망을 주지않은채 서영이에게 말을 한다.

"한번 하자" 참 발칙한데 끝까지 밉지않은 매력을 보여줘서 준호야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