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전히 제목 때문이었어요, 이 시집을 집게 된 것은요. <밥값> 정호승

어머니 / 아무래도 제가 지옥에 한 번 다녀오겠습니다 /

아무리 멀어도 / 아침에 출근하듯이 갔다가 / 저녁에 퇴근하듯이 다녀오겠습니다 /

식사 거르지 마시고 꼭꼭 씹어서 잡수시고 / 외출하실 때는 가스불 꼭 잠그시고 /

너무 염려하지는 마세요 / 지옥도 사람 사는 곳이겠지요 /

지금이라도 밥값을 하러 지옥에 가면 / 비로소 제가 인간이 될 수 있을 겁니다 // <밥값>

 

시인은 밥값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네요. 밥값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여워하거나 슬퍼하지 말라, 왜냐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밥값을 해야 인간이 된다고 하니까요. 그렇게 밥값을 하러 지옥에 다녀오겠다는 시인의 의지는, 비장하기만 합니다. 밥값의 현장은 늘 그렇지요. 가끔 지옥도 되고 천국도 되는, 그러면서 희노애락을 얻을 수있는 곳이기도 하고요. 지금도 각자 자리에서 밥값들 잘 하고 계시지요? 고되더라도 그렇게 사는 우리는 인간다운 인간, 되겠습니다.

 

일생에 한 번쯤 / 수덕사 수덕여간에 여장을 풀고 / 평생 오지 않았던 잠을 자보아라 /

열매맺지 않는 꽃이 붉은 열맹르 맺을 것이다 / 비록 이튿날 아침 깨어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 일생에 하룻밤쯤 / 수덕여관 산당화에 기대어 잠을 자보아라 / ... 그래도 평생 오지 않는 잠이 있다면 / 수덕여관 샘물을 한 바가지 들이켜보아라 / 물 위에 코끼리를 타고 / 모든 쓸쓸한 사랑이 지나가버린다 // <수덕여관>

 

잠 못 이뤄 고통인분들, 수덕여관 한 번 다녀오심이 어떨까요. 수덕여관에 갔더니 이 시에서처럼 잠이 폭포처럼 죽음처럼 쏟아지더라, 한다면 아마 수덕여관을 안고 있는 수덕사, 그 뒤에 덕숭산의 맑디맑은 기운이 아닐까 싶어요. 몇 년 전 한 겨울, 잠시 들러 훑어보기만 했던, 수덕여관,나혜석님이 머물기도 했다던 그 곳, 언젠가 가게 된다면, 하룻밤 머물고 싶은 충동입니다. 꼭 수덕여관이 아니어도, 가기만 하면 스트레스가 녹고 긴장이 이완되어 강 같은 평화를 만끽할 수 있는곳, 그런 곳 하나쯤 '나만의' 아지트로 지정해봄은 어떨까요.

 

제주도 서귀포 / 이중섭 가족 네 식구가 / 바닷게들과 가난하게 살았던 / 초가 문간방

솥단지 하나 달랑 입구에 놓여있는 / 1.4평짜리 방 한 칸 / 그 좁은 방 안을 들여다보다가 / 깜짝 놀랐다/한라산이 방 안에 저 혼자 앉아 / 어깨에 쌓인 흰 눈을 / 털고 있었다 // <이중섭의 방>

 

제주도 피란가서 머물렀다는 이중섭의 집, 지금은 그 뒤로 웅장한 이중섭 미술관도 지어졌지만, 그가 살았던 그 오막살이 같은 집을 보고 나도 깜짝 놀란적이 있어요. 어떻게 이 작은 집에서 네 식구가 살 수있을까, 믿기지 않을만큼 좁은집, 난 그런 걱정스러운 생각만 들었는데말에요. 역시 시인은 다르군요. 한라산이 방 안에 앉아 있었다니, 참신하죠. 제주도 땅 어디에 서있어도 눈에 환한 한라산이 이중섭의 방안에까지, 그러니 그들은 누추한 살림에도, 행복하게 이겨낼 수 밖에요.

 

홀로 술을 들고 싶거든 다산 주막으로 가라 / 강진 다산 주막으로 가서 잔을 받아라 /

다산 선생께서 주막 마당을 쓸고 계시다가 / 대빗자루를 거두고 꼿꼿이 허리를 펴고 반겨주실 것이다/

주모가 차려준 조촐한 주안상을 마주하고 / 다산 선생의 형형한 눈빛이 달빛이 될때까지 /

이 시대의 진정한 취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겨울 창밖으로 지나가는 딱딱한 구름과 술을 들더라도/ 눈물이 술이 되면 일어나 다산 주막으로 가라 /술병을 들고 고층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리지 말고 / 무릎으로 걸어서라도 다산 주막으로 가라 / ...... <다산 주막> 중에서

 

 

삶이 스산스러울 때 술 한 잔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것, 작고도 큰 위로지요. 어디든 멀다하지 않고 달려갔더니, 하던 일 멈추고 따뜻한 눈빛으로 맞아주는 사람이 있다는것, 얼마나 살맛나는 일일까요. 조선의 대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귀양지, 전남 강진에 다산. 그 곳에 가면 그런 분을 만날 수 있다고 합니다. 나에게도 다산처럼 그 때마다 가슴을 열고 잔을 내밀 사람이 있는지, 가만 헤아려봅니다.

 

희디흰 눈길 위로 / 누가 걸어간 / 발자국이 보인다 / 새의 발자국이다 / 다행이다 // <눈길>

 

혼자 살아가기엔 감당하기 힘든 세상, 누군가 곁에 있다는 것은 든든한 일이죠.

새의 발자국마저도 안심이 되는, 사람은 그렇게 더불어 살아야하는 존재인가봐요.

제주도 올레길에 두어시간을 가도가도 사람이란 그림자도 보이지 않을 때, 그래서 살짝 두려움이 감돌 때 깊은 산속에서 가끔씩 소리내주는 새소리가 뭉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는데요, 그 때가 생각나는군요.

 

어느 벽보판 앞 / 현상수배범 전단지 사진속에 / 내 얼굴이 있었다/

안경을 끼고 입꼬리가 축 처진 게 / 영락없이 내 얼굴이었다 / 내가 무슨 대죄를 지어 / 나도 모르게 수배되고 있는지 몰라/

벽보판 앞을 평생을 서성이다가 / 마침내 알았다 /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죄 /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 /

늙어버린 죄 // <어느 벽보판 앞에서>

 

섬짓하고, 양심의 가책마저 느껴집니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죄,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 늙어버린 죄! 죽기 직전, 현상수배되지 않으려거든, 지금 당장 온마음을 다해, 사.랑.합시다.

 

늘 사람사는 저 외진곳에서부터 따뜻함을 그려내는 정호승의 시들을, 느낌이 오는대로 편안하게 읽었답니다. 읽다보니 80여 편의 시 중에 오롯이 와 닿는 것이 다섯 편 정도가 됩니다. 지금의 느낌에서는그렇지만, 어느 날 다시 읽게 된다면, 그 날의 정서대로 또 다른 시들이 와 닿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