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은 수면을 간질이고 태양은 서산에 걸렸네 / 봄은 왔어도 한적한 지 오래라

떨어진 꽃잎 낭자하고 취흥도 가시어 / 취한 듯 꿈속인 듯 노래 부르네

 

임의 패옥 소리 끊어지니, 저녁 화장 지워져도 / 누가 있어 머리 다듬을까

봄날 풍광에 젖어 아리따웠던 젊은 날 그리며 / 황혼 녘 홀로 난간에 기대어 서있네

- 완랑귀(阮郞歸)

 

중국 오대십국 시기 남당 후주인 이욱의 사 작품을 모은 사집. 사(詞)는 당대 중엽에 발생하여 송대에 유행하다 송의 멸망과 함께 사라진 장르다. 사는 시(운문)의 범주에 속하지만 사와 시는 표현하는 내용과 어휘의 사용이 다르다. 또한 사는 대부분 악곡에 맞춰 노래하기 위해 가사로 지어졌다는 점이 시와 가장 큰 차이점이다.

 

사는 민간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여 진다. 위진 남북조 이래 이민족과의 접촉이 빈번해지자 갖가지 경로를 통해 흘러 들어온 서역의 음악과 내륙의 민간 가곡이 결합하면서 신흥 속악이 생겨난다. 일반인들은 이 신흥 속악에 맞추어 노래 부르기 시작했고 그 노랫말이 바로 ‘사’라는 것. 성당(盛唐) 시기 사회가 안정되자 민간서 대량의 사가 나왔고 문인들도 이 신흥 장르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악곡 가사용으로 창작되던 사라는 신흥 문학 형식은 만당 시기에 더욱 발전해 정식 문학 장르로 자리 매김한다. 그리고 오대십국 시기에는 이욱과 같은 황제도 사작(詞作)에 전념하는 등 사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문학 장르로 자리매김한다.

 

지난 일이야 그 슬픔 견디면 그만이나 / 눈앞의 풍광은 견딜 길이 없구나

적막한 정원엔 가을바람 소슬하고 / 계단엔 이끼 가득하네

문 앞에 드리운 주렴 종일토록 그대로니 / 누가 있어 찾아올까

 

황금 쇠사슬 갑옷 이미 땅에 묻히고 / 장부의 기개 잡초 더미에 묻혀 버렸네

서늘한 저녁 하늘은 고요하고 / 달빛은 천지를 비추는데

옥루 요전의 그림자 / 홀로 진회강 비치고 있으리

- 낭도사(浪淘沙)

 

“이욱은 문장뿐 아니라 서예와 음악과 그림에도 뛰어났다. 그래서 그는 황제 이전에 문인이었고, 문인 중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훌륭한 사인이었다. 불행이라면 이런 그가 황제가 된 것이다. 문인의 감정과 시각으로 위기에 빠진 조국, 소용돌이치는 강대국과의 대치 국면을 헤쳐 나가는 것은 불가능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런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신앙으로 불경을 낭송하고, 취미 활동으로 사를 짓고, 여흥으로 연회와 가무를 즐기며 취생몽사하듯 살아가면서 송나라가 와서 남당을 거두어 줄 날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저자인 이욱은 황제였으나 불우했다. 이욱이 즉위하기 전부터 남당의 국력은 쇠퇴일로였다. 아버지 중주 때에도 후주(後周)의 강공 전략 앞에 순종해야했다. 북송 건립 후 중주는 남당 수도를 강서성 남창(南昌)으로 옮기고 금릉에는 태자인 이욱만 남겨졌다. 몇 달 뒤 중주가 병사하자 이욱은 25세의 나이에 남당의 군주가 된다.

 

이욱은 황제가 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중주 이경의 여섯 째 아들로, 큰형 이홍기를 제외하고 위의 네 형이 모두 일찍 죽어 둘째 아들로 자랐다. 태자인 큰형은 이욱과는 달리 시기심도 많고 정치적인 야심도 컸다고 한다. 이욱은 그런 형을 무척이나 무서워해서 매일 불공을 드리며 책이나 읽고 그림을 그리며 사나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큰형이 정적인 숙부 경수를 독살하고 머지않아 어이없는 죽음을 당하자 남당의 대를 이을 자는 이욱만 남게 되었던 것이다.

 

앵두꽃 지고 봄은 가 버렸는데 / 나비는 가루 날리며 쌍쌍이 나네

두견새는 작은 누각 서쪽에서 달 보고 우는데 / 금빛 주렴 애처로이 일렁거리네

 

인적 끊기고 적막한 거리 / 뿌연 밤안개 속 풀잎은 희미하고 / 봉황 향로에서 연기는 피어오르는데

괜스레 비단 허리띠 부여잡고 / 고개 돌리니 밀려드는 슬픔 가눌 길 없네

- 임강선(臨江仙)

 

이욱 부친인 중주 이경 역시 훌륭한 사인이었고 대신 중에는 시사의 대가였던 풍연사(馮延巳)도 있었다. 이러한 남당의 문화적인 분위기 속에서 이욱은 당시 신흥 문학 장르였던 사의 새로운 경계를 연 것으로 평가된다. 송 태조 조광윤의 군대가 금릉을 포위하고 있을 때도 “櫻桃落盡春歸去”로 시작하는 [임강선(臨江仙)]의 사구를 놓고 고민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 사를 다 짓기도 전에 송의 군대가 금릉을 함락해 그는 포로의 신분으로 변경[개봉(開封)]으로 압송되고 그곳에서 이 사의 마지막 세 구절을 완성했다고 전해진다.

 

사십 년을 이어 온 나라, 삼천 리 강산 / 궁궐의 누각은 하늘에 맞닿았고

진귀한 나무들은 연무가 서린 듯 울창하네 / 언제 전쟁을 알기나 했던가?

 

하루아침에 남의 나라 포로 되고 보니 / 허리는 심약처럼 마르고 / 머리칼은 반악처럼 세어 버렸네

가장 괴로운 건 창황 간에 종묘사직과 이별하던 그때라

교방에서 연주하는 이별가에 / 궁녀들에게 눈물 보이고 말았지

- 파진자(破陣子)

 

이욱의 사풍은 송의 포로가 되어 변경으로 끌려가던 975년을 전후기로 하여 확연하게 나뉜다고 한다. 전기 작품은 중국 최초의 사집으로 후촉(後蜀)의 조숭조(趙崇祚)가 편찬한 [화간집(花間集)]의 사풍을 답습해 궁궐의 호화로운 생활과 극도의 우수를 담아내었다고 한다. 후기 작품은 송의 포로가 되어 생활하던 시기의 것으로 이 시기의 사가 예술적으로나 후세에 끼친 영향력이 상당하다. “春花秋月何時了”로 시작하는 [우미인], “簾外雨潺潺”으로 시작하는 [낭도사], “四十年來家國”으로 시작하는 [파진자]는 현재도 애송되는 천하의 절창이다. [우미인]의 경우 덩리쥔(鄧麗君)이 [근심이 얼마나 많으신지요?(幾多愁)]라는 제목으로 노래하기도 했다. 이욱의 후기 사풍은 소식(蘇軾)과 신기질(辛棄疾) 등의 호방파 사풍을 선도했다고 한다. 이욱의 사는 인간사화(人間詞話)에서 왕국유(王國維)가 이야기한 것처럼 “이 후주에 이르러서 사의 경계가 확대되고 느낌이 깊어졌다”라고 평가된다.

 

춘화추월은 언제라야 끝이 나고 / 지난 일은 언제라야 잊을까?

어젯밤 작은 누각엔 다시 또 봄바람 불어왔건만 / 달 밝은 이 밤 고국 쪽으로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하겠구나

 

아름다운 난간과 옥 계단 그곳에 여전하련만 / 이내 홍안만 변했구나

내게 근심이 얼마나 많은지 물으시었소? / 봄날 동으로 흐르는 장강 같다오

- 우미인(虞美人)

 

 

 

다음은 수록된 작품 목록이다.

 

완계사(浣溪沙) 일곡주(一斛珠) 옥루춘(玉樓春) 자야가(子夜歌) 보살만(菩薩蠻) 보살만(菩薩蠻)

보살만(菩薩蠻) 경루자(更漏子) 희천앵(喜遷鶯) 채상자(采桑子) 장상사(長相思) 유지(柳枝)

어부(漁父) 어부(漁父) 도련자령(搗練子令) 사신은(謝新恩) 사신은(謝新恩) 사신은(謝新恩)

사신은(謝新恩) 사신은(謝新恩) 청평악(淸平樂) 채상자(采桑子) 우미인(虞美人) 오야제(烏夜啼)

임강선(臨江仙) 파진자(破陣子) 망강남(望江南) 망강남(望江南) 망강남(望江南) 망강남(望江南)

완랑귀(阮郞歸) 상견환(相見歡) 후정화파자(後庭花破子) 도련자(搗練子) 자야가(子夜歌)

낭도사(浪淘沙) 삼대령(三臺令) 우미인(虞美人) 낭도사(浪淘沙) 상견환(相見歡) 장상사(長相思)

접련화(蝶戀花) 완계사(浣溪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