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 쏘는 데에는 아무도 당할 자가 없는 명인 포이보스도 결국 그보다 더 정확한 팔을 가진 한 아이에게 지고 말았어요. 그 아이가 날개를 휘젓고 날아다니면 하늘에서나 지상에서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지요." - 파이드라

 

로마 철학자 세네카의 희곡 중 <아가멤논>과 <힙폴리투스>를 수록하고 있는 책. 세네카는 로마의 철학자로 스페인 코르도바의 기사 계급 명가에서 출생한다. 아버지는 웅변가 마르크스 A. 세네카(대세네카)이다. 그래서 아들 세네카를 철인 세네카 또는 소세네카라 한다. 세네카는 어릴 적 부친과 로마로 이주한다. 로마에서 그는 정치 무대에 나서기 위해 수사학을 공부하며, 소티온과 아타로스로부터 철학을 배운다. 특히 윤리 도덕에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아버지는 법률을 공부하도록 하여 이후 세네카는 변호사가 되어 원로원에 진출, 고매한 인격과 격조 높은 웅변으로 명성을 얻는다. 그러던 중 클라우디스 황제 때 황후 멧사리나의 모함으로 코르시카 섬에서 8년 간 유배생활을 한다. 이 8년 동안의 불안과 좌절이 <플리비움에의 위로>, <헬리비아에의 위로>, <섭리론>, <분노론> 등에 잘 드러난다. 또한 상연보다 독자를 위해 쓰여졌다고 하는 아홉 편의 비극 <광란의 헤라클레스>, <트로이의 여인들>, <에리아>, <힙폴리투스>, <오이디푸스>, <아가멤논>, <티에스테스>, <오이타의 헤라클레스>, <페니키아의 여인들>이 모두 코르시카에서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 작품들은 그리스 비극의 모작이지만 유려한 문장으로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서구 근대 비극에 큰 영향을 줬다고 한다.

 

클라디우스 황제가 멧사리나와 이혼 후 아그리피나를 새 황후로 맞이하며 세네카는 풀려난다. 그리고 아그리피나가 데려온 전 남편 아들의 개인교수가 되는데, 이 아들이 폭군으로 유명한 네로이다. 예상치도 못하게 권력과 부를 누릴 수 있게 된 세네카는 네로가 황제로 즉위하자 로마의 실권을 얻게 된다. 네로는 치세 초기에 선정을 베풀지만 차츰 폭군으로 변모하고 이내 세네카도 눈엣가시처럼 여겨졌다. 그러던 중 세네카는 네로를 제거하는 음모에 가담한 혐의를 받자 자살한다.

 

<아가멤논>은 그리스 신화 중 영웅 아가멤논을 주인공으로 하는데, 그는 그리스 신화에서 아르고스 왕이며 그리스 군 총수로 트로이 전쟁서 큰 승리를 거두나 불행하게도 아내의 정부에 의해 암살된다. 이 작품에는 그 사건의 경위가 잘 묘사된다. 트로이 전쟁은 호메로스의 시에 나오는 그리스 고대 전설적인 전쟁으로, 스파르타 왕비 헬레네가 트로이의 왕자에게 유괴 당하자 이를 되찾기 위해 아가멤논을 총대장으로 한 10만 그리스 군사가 10년간 격전을 벌인 끝에 토로이 성을 함락한다는 줄거리를 갖는다. 이 작품은 남녀 간의 사랑과 증오, 간음, 원한, 보복, 살상 등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야기는 아가멤논이 전쟁 중 포로로 잡아 온 여인을 사랑하는 데에서부터 시작되며 전쟁의 처절한 묘사를 곁들여 참혹한 인간의 운명을 매끄러운 대사로 그려 나간다.

 

<힙폴리투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소재를 취한다. 아티카의 영웅 테세우스와 그의 전처 안티오페와의 사이에 힙폴리투스라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아버지와 같은 매력과 미덕을 겸비한 그는 젊은 계모인 파이드라의 연모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녀의 불의의 유혹을 뿌리치자 그녀는 이에 앙심을 품고 남편 테세우스에게 아들이 자기를 유혹했다고 모함한다. 질투심에 눈이 뒤집힌 테세우스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간청하여 힙폴리투스를 죽게 만든다. 파이드라는 자기의 모함으로 죄 없는 힙폴리투스가 비참한 죽음을 당하자 결국 남편 테세우세에게 사실을 고백한다. 그리고 저승에서나마 자신의 사랑이 이뤄지기를 기약하며 스스로 가슴에 칼을 꽂는다.

 

역자에 의하면, 이 작품은 구약 성서에 나오는 야곱의 아들 요셉이 이집트로 팔려가 주인인 보디발의 아내에게 유혹받고 이를 거부하자 아내가 남편에게 요셉이 자기를 유혹했다고 모함한 고사를 연상시킨다. 힙폴리투스가 죽음을 당한 데 반해 요셉은 감옥에 갇혔다는 것이 다르다. <힙폴리투스>는 도리에서 벗어난 남녀 간의 사랑의 말로를 그린 비극이다. 그 줄거리는 간단하지만 문장이 뛰어나 박진감이 넘친다. 이 작품은 스토아 철학의 금욕적인 윤리와 쾌락주의가 추구하는 윤리를 잘 대비시켜 보여준다고 한다.

 

"나는 모든 여자들을 싫어해. 아니, 오히려 두려워하지. 나는 여자들을 피해 다녀. 아니, 미워하지. 판단에 의해선지 본능에 의해선지 아니면 광기에 의해선지 알 수 없지만, 난 내가 여자를 싫어한다는 것에 만족해. 여자에 대한 나의 증오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거야. 설사 사라진다 해도 그것은 불과 물이 공존하거나 모래펄에 끌어올린 배가 안전하거나 해가 서쪽에서 뜨거나 늑대가 새끼 사슴을 핥아 주게 되는 때일 거야." - 힙폴리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