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라는 나라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한 건 고등학생일 무렵이다. 모형 만들기를 좋아했던 나는 자연스럽게 전쟁사(戰爭史)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2차 세계대전 참전국 중, 내가 알게 된 러시아는 신기하기까지 했다. 당시 공업수준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높은 군수물자의 생산량, 훈련도 받지 못한 채 전장에서 사라진 많은 러시아 병사들, 전쟁보다 더 가혹한 스탈린 정부의 정책 등을 견뎌낸 러시아 민중들의 사고방식이 좀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같은 유럽의 테두리 안이지만 영국과 미국 혹은 프랑스와 독일에서 파생된 합리적 사고와 이성적 논리를 중심으로 한 서양식의 근대적 사고로 러시아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시간이 흐른 후 러시아 민중의 문화적 특징에는 동양의 사고방식 즉, 정(情)과 한(恨)의 속성이 포함돼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즉, 러시아는 서양의 합리론과 끈끈한 동양식 감성이 섞여 있다는 결론을 얻게 됐다. 유럽과 아시아의 점이지대. 바로 러시아는 그런 곳이었다. 지정학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는 도스또예프스끼의 거의 모든 부분을 담아놓은 욕심 많은 책이다. 물론 그 욕심은 책을 통해 충분히 채울 수 있다. 인류의 대문호 도스또예프스끼 그가 살았던 흔적, 그가 남긴 편지, 그가 살았던 집과 공간을 직접 발품을 팔며 답사한 글쓴이 이병훈 교수의 노고에 먼저 깊은 존경을 표하고 싶다. 대작가의 일생을 고스란히 담아낸 이 책은 책 자체로도 기분 좋은 무게감이 느껴지는 여행기이자, 평전이자, 에세이였다. 반자본과 반이성, 그리고 반사회주의를 주장했던 도스또예프스끼의 사고 저변에는 분명 감성적이며 동시에 인간의 선(善)에 대한 가치를 드높이려 했던 동양의 사고방식을 책을 통해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렇습니다, 러시아인의 사명은 의심할 여지없이 전 유럽적이며 전 세계적입니다. 진정한 러시아인이 된다는 것은, 완전히 러시아인이 된다는 것은(결국 이 점을 명심해야 하는데) 곧 모든 사람의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원한다면 전 인류가 되는 것입니다. 아아, 러시아의 슬라브주의와 서구주의는 역사적으로 필요한 것이지만 둘 다 큰 오해에 지나지 않습니다.

-본문 320쪽.

 

 뿌쉬낀에 대한 도스또예프스끼의 연설은 현재의 우리에게도 충분히 의미심장하다. 당시 러시아는 산업혁명의 후발주자였다. 기술 발전은 물론 문화와 교양에 관련된 부분에서 러시아는 아직 후진국이었다. 당연히 서구의 합리적 이성관, 과학적 사고관은 당시 러시아 지식인들의 주된 사상이었다. 그들은 무지함의 잠에 빠져 있는 러시아 민중들을 깨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구식 합리주의로 말이다. 러시아 민중이 지닌 뿌리 깊은 민족주의적 정서에 대한 러시아 지식인의 경멸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서구의 합리적 사고방식과 과학 기술의 발전이 남긴 유산이 무엇인가? 편안함과 안락함 주었다고 하지만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전례 없는 불안과 공포 속에서 살고 있다. 과학적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탄생한 사회주의는 어떻게 몰락했으며, 그 건너편에서 합리적 효율성으로 무장한 자본주의는 또 어떻게 몰락해가고 있는지 우리는 그 과정 속에서 살고 있다. 뿌쉬낀의 시가 도스또예프스끼를 열광케 한 이유는 바로 이거다. 그의 시가 러시아 민중의 근원에서 출발하고, 그의 사상이 형제애로 열매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서구식 사고의 근원보다 더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이 바로 오랜 세월 살아온 민초들의 사고방식이라는 사실. 바로 그것이 도스또예프스끼의 사고방식이기도 하다.

 

 “죄와 벌”에서 살인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라스꼴리니꼬프의 사고는 바로 합리적 이성과 다르지 않다. 한 사람을 죽이고 많은 사람이 행복하다는 식의 지독한 합리성. 결국 라스꼴리니꼬프는 새로운 변화를 암시하며 유형지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변증법의 논리가 아닌 새로운 무언가를 몸으로 느끼며 말이다. 개인적으로 라스꼴리니꼬프의 깨달음은 정과 한의 논리와 비슷한 동양적 사고방식이 아닐까 싶다. 공동체주의와 형제애 그리고 지역주의가 다음 세대의 번영을 위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부분이라 생각해 보면, 도스또예프스끼의 글에서 나타난 민족주의적 관점은 현 시점에서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그리 두껍지 않은 책이지만 많은 걸 담고 있다고 전술한바있다. 책은 제목에 걸맞은 아름다움 또한 지니고 있다. 현재 러시아의 사진들이며, 예전 발행된 책들의 삽화며, 도스또예프스끼의 사진과 초상화 그리고 많은 볼꺼리들. 게다가 수준 높은 작품해설과 작가의 분석. 쉽게 읽을 수 있는 작가가 아니기에 완독한 책은 “죄와 벌” 밖에 없지만 몇 번 읽다가 포기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을 다시 펼쳐야겠다. “지하로부터의 수기”도 다시 찾아 놓았다. 지금 다시 도스또예프스끼를 읽는 것은 다음 세대, 아니 지금 세대에 필요한 사고방식을 배우기 위함이다. 어쩌면 100년을 먼저 살다간 대문호에게서 우리 시대의 문제점들의 해결책을 찾을 수도 있을 듯싶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참 좋은 길잡이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