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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 성장의 숲

(비밀의 숲 테라비시아)를 읽고

인간을 성장시키는 것은 대부분이 슬픈 사건인 듯하다. 부모의 사망으로 한결 성숙해지는 자식이 있는가 하면, 아끼던 무엇을 잃어버린 뒤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결혼이든 진학이든 한 핏줄을 나눈 형제와 먼 거리로 헤어진 뒤에 성장의 요인이 되는 것은 그리움이다.

어떤 것이든 작별의 아픔만큼 한 사람을 자라게 하는 것은 없는 듯하다. 그러고 보면 어떤 식으로든 사라진 대상은 남은 자를 성장시키는 거름이 되는 것일까?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대중가요 가사가 대단한 진리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비밀의 숲 테라비시아)는 처음으로 마음을 열고 사귀었던 친구를 떠나보낸 뒤 한층 성숙해지는 소년, 제시 아론즈의 이야기다. 누나와 여동생들 사이의 외동아들인 제시는 집안의 천덕꾸러기다. 집에서는 소 젖 짜는 일을 도맡고, 학교에서는 음악을 가르치는 에드먼즈 선생님 외에는 누구에게나 무시만 당한다. 다행히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은 퍼킨스 씨 집에 새로 이사 온 레슬리 버크와 친구가 된다. 둘은 숲 속에 테라비시아라는 궁을 만들어 왕과 왕비가 되어 논다. 레슬리의 강아지는 테리언 왕자가 되는 테라비비아에만 가면 제시는 행복해진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 가지 않는다. 며칠 동안 비가 내린 뒤 제시가 에즈먼즈 선생님과 워싱턴에 가서 가장 즐거운 하루를 보낸 날 레슬리가 죽는다. 테라비시아로 가기 위해 매달아 둔 줄이 끊어지는 바람에 레슬리가 죽은 수 제시는 집과 학교에서 존재감을 회복한다.

이 작품은 뉴베리상 수상작이다. 뉴베리상은 미국도서관협회가 해마다 가장 뛰어난 아동도서를 쓴 작가에게 주는 상이다. 이 책은 우리의 정서와는 걸맞지 않은 내용이어서 그렇듯 뛰어난 아동도서인가, 하는 의구심은 생겼지만 자존감이 부족한 5학년 소년이 스스로의 자존감을 회복하는 것은 마음에 남는다.

따돌림 문제가 심각한 요즘이다. 집안에서 자존감이 부족한 아이는 밖에서도 대개 기를 펴지 못한다. 더러는 그와 반대로 자신이 받은 핍박을 밖에서 화풀이라도 하듯 더 못되게 나타내는 경우도 있지만 전자가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제시의 처지는 여간 안쓰러운 것이 아니다. 아무리 남녀평등이라고 해도 우리나라 같으면 제시의 위치라면 집안에서 가장 사랑받을 처지다. 남매뿐이라고 해도 아들에게 마음을 더 쏟는 것이 우리의 정서다. 하물며 제시는 1남 4녀의 틈바구니에 끼인 외동아들이 아닌가? 그런 위치라면 자칫 응석받이나 독불장군으로 자랄 만큼 집안의 기대와 관심을 한 몸에 받을 것이다.

그렇지만 제시는 다르다. 집안에서 해야 하는 궂은일은 모두 제시의 차지다. 그런 데다 누나들의 무시와 말썽쟁이 여동생 마이벨의 놀림을 받기 일쑤다. 그럼에도 동생을 괴롭히는 여학생 제니스를 혼내주기까지 하는 듬직한 오빠다. 물론 레슬리의 지혜 덕분이지만.

이런 제시에게 테라비시아는 안식처였던 것 같다. 자신의 자존감을 회복시켜주는 소중한 장소이기도 했다. 숲에는 무서운 선생님도 없고, 괴롭히는 상급생도 없고, 구박하는 누나들도 없기 때문이다. 가난한 살림을 꾸려가기 바쁜 부모와 드세기만 한 여형제들 사이에서 외롭고 숨 막히는 생활을 하다가 그 곳에서는 왕이 된다는 사실이 제시에게는 여간한 매력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나마 제시는 마음이 건강한 아이라는 것이 다행이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기보다 그리기와 달리기로 달래는 것은 제시의 긍정적인 발전을 기대하게 한다. 어쩌면 그런 제시의 소양이 레슬리의 죽음으로 인한 기막힌 슬픔까지도 자신을 성장시키는 발판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던 것 같다.

레슬리의 죽음은 말할 수 없이 안타깝다. 테라비시아로 들어가는 줄이 끊어졌다는 것은 단절감을 느끼게 한다. 다만 그 단절감이 부정적이 아니라는 것이 기분 좋다. 그 일로 레슬 리가 죽은 것은 안타깝지만, 그 일이 제시를 주눅 들어 지내던 날들과의 작별을 의미하는 듯해서다.

에즈먼즈 선생님과 워싱턴에 갔던 일이 제시로서는 스스로를 비겁한 아이라는 자책에 빠지게 할 수도 있다. 제시는 며칠 이어진 비로 불어난 계곡물이 겁났던 터였다. 당분간 테라비시아에 가고 싶지 않았지만 겁쟁이 취급이라도 당할까 봐 레슬리에게는 마음을 숨겼던 제시. 때마침 에즈먼즈 선생님의 길동무가 되어 달라는 제안에 들뜬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날이 제시에게는 가장 기쁘고 행복한 날이었다. 동시에 레슬리가 죽음으로써 가장 슬프고 불행한 날이 되었다. 자신의 마음을 숨기기 위해 레슬리에게 말을 하지 않은 제시. 그 때문에 레슬리가 죽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지만 그 일이 제시를 성장시키는 정신적인 비타민이 된 것은 무엇보다도 다행한 일이다.

제시는 용감한 소년이 된다. 용기가 없으면 자신은 물론 남까지 불행하게 만든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레슬리의 죽음이라는 부담스러울 만큼의 대가를 치렀지만 크고 소중한 깨달음을 얻게 해 준 테라비시아. 용기가 필요한 사람은 누구나 테라비시아를 가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마음 한 구석에 자신만의 궁전을 지어서 스스로를 왕으로 대접하는 연습은 꼭 필요한 일이므로.

출판사에게 바라는 아쉬움도 있다. 오자가 심심찮게 눈에 띈다는 사실이다. 오자들이 눈에 띄면 책의 흐름을 방해받아 더러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