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5.29

<히가시노 게이고> - 재인 \12,000

 정말 나오기 전부터 읽고 싶었던 히가시노 게이고의 신작 <예지몽>. 제목이나 표지부터가 오컬트적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오컬트’적 분위기와 ‘유가와’의 분석적인 분위기가 섞여진다는 게 조금은 의외였지만, <용의자 X의 헌신>에서 봤던 그 친숙한 ‘구사나기’와 ‘유가와’가 어떤 이야기를 이어나갈지 궁금해 하며 책장을 펼치게 되었다.

5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는 <예지몽>..

 처음에 나는 <예지몽>이라는 작품이 ‘장편 소설’인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책장을 펼치자 나를 반겼던 것은 ‘1장 꿈에서 본 소녀’라는 한 단편의 타이틀이었다. <예지몽>은 ‘꿈에서 본 소녀’, ‘영을 보다’, ‘떠드는 영혼’, ‘그녀의 알리바이’, ‘예지몽’의 5장으로 이루어진 단편집이었던 것이다.(나는 폴터가이스트 현상이 다뤄진 ‘떠드는 영혼’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그 단편들은 하나 같이 ‘오컬트’적인 사건들을 다루고 있었다. 약간은 신기한, 영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그 사건들.. 하지만 그 오컬트적 사건들도 유가와의 명석한 추리에 의해 하나의 계획된 사건으로 밝혀지고, 기묘하게만 느껴졌던 영적인 빛이 벗겨지고 있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완전히 벗겨지진 않은 것 같다.

기묘하게 일어나는 초자연적 현상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예지몽>에는 초자연적? 되는 사건들.. 형사 구사나기의 집념과 유가와의 논리로 그 사건들을 하나씩 풀어나가는 것이다. 나는 <예지몽>을 읽으면서 초자연적인 현상들이 ‘음모’였다는 것을 차츰차츰 알아나갈 때마다 왠지 모를 허탈함을 느꼈던 것 같다. 내심 초자연적 현상이 존재하기를 응원했던 것일까.. 유가와의 ‘너무도 논리적인’ 그 모습에 조금은 반감이 들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난 명석한 두뇌의 유가와도 괜찮지만 아무래도 직접 발로 뛰는 구사나기 쪽이 마음에 드는 타입이니까.. 아무튼, 이러한 미묘한 감정들 때문에 작품이 끝나는 순간까지 한 사건이라도 초자연적인 것이 존재하길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기대는, 마지막 단편인 ‘예지몽’에서 충족됨으로써 내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어 주었다.

 단편 ‘예지몽’의 작품 내용이 충족 시켜주었던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마지막 부분의 소녀의 한 마디.. 다음 사건을 예견하는 그 한 마디가 예지몽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히가시노 게이고가 나에게서 반쯤 강탈해갔던 초자연적인 분위기를 다시금 내 손으로 안겨다 준 것이다. 하하.. 그 느낌이란.. 마치 빼앗긴 선물을 다시 돌려받은 어린아이의 훈훈함이랄까.. 히가시노 게이고는 다시금 ‘초자연적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생각할 여지를 제공해 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상상력’을 제한한다는 것은 가혹하고도 멍청한 행위임을 뼈저리게 알고 있는 것은 작가 바로 자신일테니까.. 참 새삼스레 히가시노 게이고의 센스에 감탄하게 된 것 같다.

작가의 경험이 녹아 들어있는 문학..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읽으면서 매번 드는 생각이지만, 정말 한 작품에는 작가의 경험이라든지 배경 지식이 녹아들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전기 공학과를 나왔고, 엔지니어로 일했던 경험이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이기에, 여러 가지 과학적 사실들(줄다리기의 예, 유리를 가열하면 전기가 통한다는 등의)을 인용하면서 작품을 전개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문지식의 인용은 작품의 사실성(소설은 허구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을 강화 시켜주었고, 우리가 몰랐던 과학적 사실들을 일깨워 줌으로써 독자의 흥미를 유발하는 효과까지 거두고 있었다. 참.. 작가가 살아온 모든 시간들이 ‘문학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헛되이 시간을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공학과가 ‘이성적’인 느낌이 강하게 난다는 것을 핑계로 하기는 조금 묘한 감이 있지만, 공학과를 나온 히가시노 게이고가 <비밀>, <붉은 손가락>과 같은 정말 감성적인 작품을 썼다는 것은 참 대단하게만 느껴지는 것 같다.

 문득 든 생각이지만, 아마 히가시노 게이고는 유가와와 구사나기 둘 다의 성격을 가진 미묘한 인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하.. 뭐 그 인물들을 창조해 낸 ‘창조자’이시니 당연한 얘기겠지만.. 어찌 보면 그 창조자로부터 끊임없이 영향을 받고 있는 독자들도 히가시노 게이고로부터 창조된 것이니 모든 독자들의 성격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작품을 쓰고 난 뒤의 독자들의 반응에 대한 ‘예지몽’을 꾸면서 말이다. 하하.. 가장 초자연적인 존재는 ‘작가’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서평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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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밤 자신들이 죽인 원혼에게 시달리고 있을 테지, 망령은 마음속에 있으니까.” - p126

“어떤 동기가 있어. 그 동기 때문에 화가 나서 범죄를 저지르지. 그런데 한번 저지른 그 범죄 때문에 또 열이 올라 앞뒤 가리지 않고 다음 범죄를 저질러. 악순환의 표본이라고 할까. 불현듯 정신을 차려 보면 최초의 동기 같은 건 어디로 가 버렸는지 흔적도 없다는 거지.” - p140

“우리 같은 일반인은 쉽게 신비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어. 그것을 막는 것이 바로 과학 아니겠어? 자, 가지.” - p264

히가시노게이고, 예지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