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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0.02
<양귀자> - 살림 \7,000

아! 양귀자의 언어는 정말로, 참으로 아름답다. ‘모순’이라는 무거운 제목의, 그리고 “이렇게 살아서는 안 돼”라는 울부짖음과 느닷없는 눈물로 시작하는 이야기가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을까. 그녀 작품 속에서 흘러넘치는 아름다운 언어. 이것이 바로 <천년의 사랑> 이후에 또 다시 그녀의 작품을 찾게 된 이유다.

모순. 익히 들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이 두 글자를 막상 말로 설명해 내려니 쉽사리 입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감정인지 알고 있다는 것은 나 또한 살아오면서 모순을 겪었던 적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다만, 경험을 했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일 뿐.. 양귀자의 <모순>은 내가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내가 잊고 있었던 이런 부분들을 찬찬히 보여주고 있었다.

안진진. 이름조차도 부정을 뜻하는 굴레를 지고 살아가는 주인공. 처음에는 그녀의 삶이 단순히 ‘어렵다’, ‘불쌍하다’와 같은 단어들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정처 없이 유랑하는 아버지,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어머니, 조직 보스의 흉내만 내고 다니는 철없는 동생, 그리고 자신의 가족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는 이모의 가족에 대한 동경.. 뭘 해도 자꾸만 일이 꼬여가는 그녀의 삶 속에서 “이렇게 살아서는 안 돼”라는 절규가 그저 안타깝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그들을 단순히 ‘불행하다’라는 말로 규정지을 수 있을까? 완벽한 삶을 살고 있었던 이모의 죽음과 어떤 고난에도 꿋꿋이 살아가는 어머니의 모습 사이에서 누가 더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판단할 수가 있을까. 풍요 속의 빈곤, 빈곤 속의 풍요.. 이 모순의 순간에서 나의 판단력은 자꾸만 흐려진다.

어쩌면 애초부터, 누군가의 삶을 판단한다고 말하는 그 시점부터 우리는 모순의 출발점 상에 서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불행한 삶’이란 어떤 것을 뜻하는 것일까? 그럼 ‘행복한 삶’이란 또 무엇인가? 이것들은 하나의 허상이었을 뿐, 속을 파고들어가 보면 온갖 추상적인 생각들의 메아리에 불과했다. 삶이란 결국엔 하나의 길로 흘러 들어가지 않는가. 굴곡의 폭이 서로 조금씩 차이가 나는 것일 뿐 한 인간의 삶을 불행하다고, 혹은 행복하다고 규정하며 하나의 숙명처럼 지고 살아가야 할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인생이란 받아들여야 할 것도, 탐구해야할 것도 아니다. 그것은 뜨겁게 살아가야할 무언가 이다. 우리들은 수많은 불행들을 겪으며 살아간다. 때론, 행복보다 월등히 많이 찾아오는 그 녀석들에게 한탄하면서, 욕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우리들의 삶의 부피를 늘려주는 것은 행복이 아니고 우리가 그토록 피하려고 애쓰는 불행이다. 불행을 많이 겪은 자가 더 크게 웃을 수 있다는 모순. 불행할 것을 이미 알면서도 그 길을 걷게 되는 모순. 도처에 자리 잡고 있는 모순들 속에서, 우리는 인간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살아간다.

“아껴서 좋은 것은 돈만이 아니었다. 어쩌면 돈보다 더 아껴야 할 것은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내뱉는 말들이었다.” - p68

“사랑을 시작한 사람들에게 한 달은 모자란 시간 때문에 한없이 짧다. 또한, 사랑을 시작한 사람들에게 한 달은 무엇이든 다 이룰 수 있을 만큼 한 없이 넉넉한 시간이기도 하다. 그 한 달 동안 사랑을 완성할 수도 있고 또한 사랑을 완전히 부숴 버릴 수도 있다.” - p90

“사람들은 작은 상처는 오래 간직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 버린다. 상처는 꼭 받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는 꼭 돌려주지 않아도 될 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장부책 계산을 그렇게 한다.” - p116

“철이 든다는 것은 말하자면 내가 지닌 가능성과 타인이 가진 가능성을 비교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에 다름 아닌 것이었다.” - p130

“나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것은 타인의 불행뿐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억울하다는 생각만 줄일 수 있다면 불행의 극복은 의외로 쉽다. 상처는 상처로 밖에 위로할 수 없다.” - p165

“세상의 모든 잊을 수 없는 것들은 언제나 뒤에 남겨져 있었다. 그래서, 그래서 과거를 버릴 수 없는 것인지도.” - p173

“사랑이란 그러므로 붉은 신호등이다. 켜지기만 하면 무조건 멈춰야 하는, 위험을 예고하면서 동시에 안전도 예고하는 붉은 신호등이 바로 사랑이다.” - p191

“인생의 부피를 늘려 주는 것은 행복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그토록 피하려고 애쓰는 불행이라는 중요한 교훈을 내게 가르쳐 준 주리였다.. 인간만큼 다양한 변주를 허락하는 주제가 또 어디 있으랴.” - p209

“인생은 짧다고, 그러나 삶 속의 온갖 괴로움이 인생을 길게 만든다고.”- p245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 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 p273

모순, 양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