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6.02

<요시다 슈이치> - 열림원  \7,800

 한 작가의 작품을 읽으려 하면, ‘수상작’을 먼저 접하기 마련인데, 나는 다른 작품들을 빙~ 둘러서 수상작을 읽게 된 것 같다. 그 이유는 아마도 수상작이라고 하면 ‘당연히 재밌겠지, 뭔가 중요한 의미가 있겠지’ 하는 강박관념에 휩싸여서 책을 소화해 내기가 부담스러워서인 것 같다.(실제로 수상작들이 전해주는 의미를 발견하지 못할 때가 많다) 하하.. 이렇게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할지라도, 문학계의 이름 있는 사람들이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수상작이라고 정해놓았는데, 그것을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127회 아쿠타가와 수상작인 <파크라이프>를 읽게 되었다.

‘공원’이라는 공간적 배경 속에서..

 처음 <파크라이프>라는 제목을 봤을 때는 ‘공원’을 떠올릴 수 없었다. ‘파크라이프’라는 다른 어떤 것이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랄까.. 아무튼, 파크라이프가 ‘Park life’인 것은 나에게는 조금 충격(?)이었다. ‘공원의 삶’..?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 의미를 알기 위해선 아무래도 공원이라는 공간에 대해 설명해봐야 할 것 같다. 공원이란 곳.. 삭막한 도시 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부자연스러운 공간.. 그 ‘부자연스러움’ 속에서 도시의 사람들이 자연을 만끽하는 곳.. ‘부담 없는 곳’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릴 것 같다. 무언가 하고 있지 않아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기 때문에 가면을 쓰거나, 애써 신경 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서로에게 관심이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전혀 부담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삶을 살면서(이 말을 대용할 다른 문장을 찾고 싶다..) 그토록 관심 반기를 원하던 사람들이 ‘전혀 관심 없는 곳’에서 안식을 얻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자신이 무언가 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전전긍긍하던 사람들이 말이다.

‘왜’라는 이유의 부재..

 <파크라이프>에선 ‘왜?’라는 물음이 결여되어 있다. 아니, 금지되고 있는 느낌이다. 공원 속의 남자가 왜 기구를 날리는지, 왜 부부는 서로 만나서 이야기 하지 않는지, 간단은 왜 사라졌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요시다 슈이치는 그것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치 그것들은 정형화된 ‘일상’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나도 모르게 이름 모를 그 여자를 만나러 가는 것이 익숙한 일상처럼 느끼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지하철의 처음 본 여자를 계속 만난다는 그 특이함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마치 요시다 슈이치의 의도가 안 그래도 복잡한 ‘시티라이프’를 살고 있는 독자들에게 ‘왜’라는 머리 아픈 질문을 하지 않음으로써 자연스럽게 ‘파크라이프’ 속으로 인도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무엇을 결심한 것일까..

 아무리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아서 독자들을 편하게 해 주었더라도, 그냥 작품이 그렇게 끝나버린다면 그저 미적지근한 느낌만 남았을 것이다. 역시나 요시다 슈이치는 은연중에 ‘왜’의 대답을 독자들로 하여금 느끼게 만드는 센스를 발휘하고 있다.

 <파크라이프>와 <플라워즈> 마지막 부분에서 작품 속의 인물들은 ‘결심’을 한다. 그 결심이 무엇인지는 나오지 않지만 그것은 조용히, 은근하게 인물들을 움직여 놓는다. 이 움직임, 그 조그만 움직임이 우리로 하여금 ‘풍경’을 볼 수 있게 한다. 풍경 속의 구성 요소들을 전부 알고 있을 때에만 볼 수 있는 그 풍경을.. 이것은 아마도 우리가 그 요소 하나하나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는 뜻일 것이다.

 ‘관심 없음’을 토대로 하는 공원에서조차도 관심을 받을 수 있다는 것. 그 속에서의 관심은 ‘가식적인 상태’에서 주고받는 것이 아닌, ‘진심’의 상태에서 주고받는 것이기에 이름모를 따스함이

‘파크라이프’를 감싸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아닐까. 파크라이프의 OB가 되기도, 한 발로 서서 그것의 시간을 재기도, 기구를 날리기도 하면서 자신의 진실 된 모습을 보이며 살 수 있는 것.(서로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지만) 그 속에서 따듯한 관심을 가지고 의미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파크라이프’가 아닐까.

그저 보여 준다는 것..

 <파크라이프>를 읽으며 새삼스럽게 요시다 슈이치가 대단하다고 느껴졌던 것은 ‘보여 주는 것’의 대단함 때문이었다. 보통 ‘보여주기’의 효과를 사용할 때에는 한 인물의 ‘표정’에 감정을 실어서 보여주는 형식을 취한다. 하지만, <파크라이프>에서의 보여주기는 그런 초보적인 수준의 표현을 훌쩍 넘어서 있다. 표정을 넘어서 몸, 움직임, 사물의 배치 등 하나하나가 전부 무언가를 독자들로 하여금 보여주고 있다. 마치 공원 속에 있는 것들 어느 하나도 불필요한 것은 없다는 의미를 띄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소재 하나하나가 가져다주는 ‘리얼리즘’이 우리를 ‘파크라이프’ 속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문득 든 생각이지만.. 이러한 요시다 슈이치의 ‘보여주기’ 방식은 표정으로 감정을 담아내기에는 이 사회를 살고 있는 인물들의 ‘가면’이 너무나 두껍기 때문에 다른 방법을 모색하다가 몸짓, 사물의 배치와 같은 것을 통하여 드러내는 방식을 택하게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가 고개를 들며 눈을 떴을 때, 과연 그 풍경은 나에게 어떻게 다가올까? 난 얼마나 내 라이프 하나하나에 관심이 있었을까? 어느 정도를 보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보게 되면서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진심으로 관심을 가진 만큼 많은 것을 보며 살아갈 수 있겠지. 많은 것을 본다는 것이 내 가면을 조금씩 벗겨줄지, 아니면 그것을 더 두껍게 만들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설령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되더라도, 가면을 벗고 진심인 채로 살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싫어하는 이유와 좋아하는 이유가 똑같다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일까.” - p19

“풍경이라는 게 실은 의식적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구나, 하는 걸 깨닫게 되었다. 파문이 퍼져가는 연못, 이끼 낀 돌담, 나무들, 꽃, 비행기구름, 그 모든 것들이 시계에 들어와 있는 상태라는 건, 실제로는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는 것과 같다.” - p29

“걱정 마. 그쪽이 보고 있는 게 뭐든 이쪽에서는 보이지 않으니까.” - p39

“함께 있고 싶지 않은 게 아니야. 함께 있고 싶으니까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옮겨다니고 있는 거지.” - p41

“아무것도 숨기고 있는 건 없다니까. 어쩌면, 자신에게는 숨길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필사적으로 숨기고 있는 건 아닐까.” - p48

“소리 없는 뉴스 영상에서는 신기하게도 몸뚱이들만이 부당한 피해를 입고 있는 듯 보였다.” - p61

“문득 배가 닫혀 있는 ‘인체모형’에는 내장이 채워져 있지 않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p67

“왠지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이 몸이 대여물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대여물이라... 그렇긴 하네. 겉모양만 개인의 것이고 속 알맹이는 전부 인류 공유물이다.” - p72

“보라고. 공원이란 장소에선 말이야,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고 누가 뭐랄 사람은 없잖아. 오히려 누굴 붙잡고 권유를 하거나, 연설을 하거나, 뭔가를 하려고 하면 내쫓기지.” - p76

“여유라는 건, 쓸 데가 없는 걸 두고 하는 말이제.” - p120

“시원해 보이면 그림이 되는 거여? 그럼 선풍기도 에어컨도 다 그림이 되는 건감? 선풍기나 에어컨은 아무리 쳐다봐도 시원해지지 않지만 얼음을 바라보면 시원하잖여. 그거이 다른 점이제.” - p135

“이 세상에 존재하는 꽃의 수만큼 사람에겐 감정이 있다.” - p136

“좋은 사람과 좋은 사람으로 묶인 이중인격이란 건 없을까? 겉이나 안이나 좋은 사람.” - p138

“잔인한 말은 대개 웃음 띤 입술에서 나온다.” - p159

요시다슈이치, 파크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