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11.17

<온다 리쿠> - 북 스토리  \11,000

 온다 리쿠의 <라이온 하트>를 읽고 난 지금,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하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눈부시게 빛나는 금발을 가진 소녀가 나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야기에 매료되었다는 것이 바로 이런 느낌일까? <밤의 피크닉>에서도 감탄했던 온다 리쿠의 스토리 텔링 능력에 의해 나는 <라이온 하트> 속 미지의 공간 속으로 빠져들었다.

 윌터 시커트의 <에어하트양의 도착>이라는 그림을 보고 영감을 받아쓰게 되었다는 이 작품.. 이를 반영한 것일까, 각 챕터의 시작에는 항상 그림이 존재하고, 그 그림은 이야기 속에서 재탄생된다. 이야기의 흐름이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엘리자베스와 에드워드의 엇갈린 사랑이라는 지배적인 주제가 없었다면, 실제로 그림에 관련된 일화를 묶어놓은 책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이렇게 완벽한 이야기 구성은 독자들로 하여금 자꾸만 길을 잃게 만든다. 시간과 공감을 넘나들며 이어지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과거, 현재, 미래 따위를 구분할 수 없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무너진 공간으로 발을 딛게 된다. 이 모호한 공간 속에선 평소 우리가 사용했던 판단의 잣대가 먹혀들지 않는다. 이야기의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상태에서 독자들은 꼼짝없이 온다 리쿠가 던져주는 단서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몰입할 수밖에 없는 완벽한 미스터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여기에, 도저히 일본인 작가가 썼다고는 느껴지지 않는 서구적 문체가 <라이온 하트>의 미스터리를 증폭시킨다. 일본 소설 특유의 느낌을(오밀조밀한 언어가 모여 정적인 감정을 자아내는 느낌이랄까) 기대하며 책장을 열었는데, 시작부터 나의 일본 소설용 잣대가 말을 듣지 않았다. 마치 일본인이 영어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것이 어색하지 않고 너무도 자연스러웠기에 나는 또 다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일본인 작가에게서 풍겨오는 서구적 느낌, 작가를 의심할 정도로 완벽한 온다 리쿠의 변신이 그녀의 미스터리를 한층 더 돋보이게 만들었다.

 이렇게 강력한 미스터리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정신없이 읽다보니 어느덧 내 손에는 마지막 장이 쥐어져 있었다. 책장을 덮는 그 순간까지도 나는 그들이 어떤 미래를 마주하게 될지 예측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에게 남겨진 이 지독한 여운처럼 그들의 인연이 끝없이 이어질 것임을 확신한다. 언제, 어디서 만나게 되든지 서로를 알아보고, 사랑을 나누게 될 것이다. 시작과 끝이 동시에 존재하기에 영원한 그들의 사랑.. 영혼은 모든 것을 뛰어 넘는다는 약속.. 온다 리쿠의 <라이온 하트>.. 소설을 뛰어 넘은 그들의 영혼에 의해, 미스터리 속에서 살아 숨쉬는 라이온 하트를 느낄 수 있었던,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항상 그렇다. 나쁜 일이 생길 것을 알면서도, 찾아가고야 만다.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찾아가고야 만다. 더 이상 친구가 아님을 알면서도 위로의 말을 기대하고 만다. 한상 그렇다. 한심하다. 이 얼마나 한심한가, 어리석은 남자여!” - p63

“그래요, 살아 있는 인간처럼 무서운 것도 없지요. 사람을 잡아먹는 건 인간뿐이니까.” - p171

“기억이란 참 재미있어요. 이것만은 잊으면 안 된다, 이것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해야 한다고 다짐하고 몇 날 며칠에 걸쳐 준비했던 것을, 막상 당일이 되면 깜빡 잊어버리고 말죠.” - p202

“사물은 분리됨으로써 보다 강하게 결합될 수 있습니다. 하나의 긴 가지를 쪼개면, 두 개의 다발로 만들 수 있습니다. 벌은 멀리 있는 벌집의 새로운 반려를 찾아 날개를 펼칩니다. 두 개의 손은 떨어져 있음으로써 비로소 굳게 맞잡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 p288

“누군가와 결합된 순간, 머잖아 탁해지기 시작하고 빛을 잃게 되거든. 헤어져 있기 때문에, 그야말로 순수할 수 있는 거지. 아주 짧은 순간의 만남만이 그 영혼을 빛나게 할 수 있어.” - p305

“영혼은 모든 것을 뛰어넘는다.” - p308

“아아, 그래. 우리는 다시 만나는 거다. 시간의 계곡에서. 누군가의 거대한 의식의 흐름에서. 다만 이 순간을 위해서만, 우리는 삶을 부여받고 지금까지의 생을 살아왔던 것이다.” - p351

온다리쿠, 라이온하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