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끔씩 남문에 있는 헌책방에 간다. 돈이 별로 없어도 마음 푸근하게 살 수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그저 휴식을 찾아 들어가기도 한다. 요즘에는 헌책방을 많이 찾아볼 수 없긴 하지만 내가 지금 다니는 곳은 대학 때부터 다녔던 헌책방이 좀 더 확장해서 옮긴 곳이라 오랜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돈이 생기면 헌책방에서 족족 다 써버리기는 하는데 저번 한 두달 동안 돈이 없어 사지 못했던 책이 네 권이 되는데 아쉽게도 나중에 가니까 그 책이 없어서 아쉬웠던 기억이 있다. 헌책방은 좋은 책을 싸게 살 수 있는 대신에 먼저 찾는 사람이 임자인 탓에 이런 일이 생기면 너무 아쉽다. 어쨌든 헌책방은 좋은 책을 찾을 수 있다는 기쁨과, 싸게 살 수 있다는 만족감과, 남보다 먼저 차지할 수 있다는 스릴감이 모두 섞여있는 선물상자와도 같다.

이런 헌책방에서 새로운 기회를 얻은 사람들이 있다. <시간이 멈춰선 파리의 고서점>의 작가 제레미 머서도 그 사람 중에 하나였다. 파리에는 “셰익스피어&컴퍼니”라는 고서점이 있는데 실비아 비치가 처음 열었던 그 유명한 고서점 - 스콧 피츠제럴드, 거트루드 스타인, 에즈라파운드 같은 인물들이 토론의 장을 열었던 - 은 아니고 그 서점이 나치가 파리를 점령했을 때 문을 닫고 나서 조지 휘트먼이라는 사람이 연 서점이었다. 처음에 열었을 때의 이름은 “르 미스트랄” 이었는데 잠잘 곳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침대를 들여놓고,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스프를 끓여놓았으며, 책 살 돈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무료 대여 도서관을 운영했다. 조지는 실비아 비치와 같이 차를 마시는 사이였는데 그녀가 죽고 나서 “셰익스피어&컴퍼니” 라고 개명하고 서점을 확장했다.

우리의 제레미 머서는 소위 말하는 잘 나가는 사회부 기자였다가 협박 사건으로 모든 걸 뒤로하고 파리로 와서 은둔생활을 하게 된 사람이었다. 잘 나갔을 때는 저축은 커녕 카드빚까지 내서 흥청망청 썼기에 그가 도망나왔을 때 수중에 있던 돈은 비행기 삯과 몇 주간 버틸 방세 비용밖에 없었다. 방을 비워줘야 했을 무렵, 정처없이 거닐고 있던 그에게 보인 “셰익스피어&컴퍼니” 서점은 구세주와 다름없었다. 사람들에게 이끌리어 들어간 그 곳은 스프를 끓여먹는 사람, 침대가 있는 방, 홍차 파티까지 일반적인 서점이 아니라 완전히 별천지같은 곳이었다. 특히 제레미와 같이 갈 곳 없는 사람에겐 말이다. 그리하여 그도 조지에게 허락을 받고는 서점에서 사는 사람들의 일원이 되었다.

그 때 당시 서점에 있던 사람들 중에는 술고래 시인이지만 5년 동안 머물러 점점 비사회적이 되어가는 사이먼, 항상 긍정적으로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는 커트,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셰익스피어&컴퍼니” 를 떠나는 대장 가우초, 밤 시간동안 카운터를 봐주는 루크, 텔레비전 보도국 기자이자 다큐멘터리 제작자이지만 정부의 검열을 견디지 못해 나라를 떠난 우구르인인 아블리미트 등이 있었다. 물론 그 뒤로도 사람들이 끊임없이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했지만 이들과의 보낸 시간들은 제레미에게는 정말 잊지 못할 시간이었을 것이다. 특히 조지에게서 제레미는 며칠 동안 몇 프랑도 쓰지 않고 보낼 수 있는 법을 터득해갔다. 옷은 손세탁을 하고, 가장 기본적인 음식만 먹고, 극장이나 식당에는 가지 않았던 조지이기에 얼마 안 되는 서점 수입을 가지고도 공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면서 서점을 확장할 수 있는 돈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만의 사회주의적 유토피아도 자본주의의 공격에 흔들리게 되었다. 세계적인 호텔왕이 “셰익스피어&컴퍼니” 를 인수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을 막기 위해 돈을 모아 옆 건물을 사서 확장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소책자를 발간하려고 하지만 결국 옆 건물은 호텔왕의 손에 넘어가버렸다. 그래도 꿋꿋하게 이 서점을 지킬 수 있는 방안을 찾고자 재단 설립을 추진하기로 하지만 워낙 사회주의적인 생각을 고수하고 있는 조지인지라 그 길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었다. 아껴서 겨우 유지하고 있는 서점인지라 전기 안전조차 제대로 설치되지 않은 서점에 재단을 설립하려면 많은 서류처리에, 많은 감시자가 생겨야 하는데 그것을 조지가 받아들이지 못해서 그 건은 물건너 가버렸다. 그리고 나서 조지가 생각해낸 것은 그의 딸 실비아가 그 서점을 인수하는 것이었는데 서로 교류가 없던 차에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제레미였다. 그가 사회부 기자였을 때 사용했던 사람찾는 기술을 이용해 그녀가 다니는 대학에서 그녀를 찾아서 파리로 오라는 제안을 했더니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그녀도 흔쾌히 동의해서 드디어 부녀간의 상봉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아버지를 닮아서 그런지 정신없는 서점생활에도 익숙해진 실비아는 연극을 공부하고 있는데 그 틈나는 대로 파트타임으로 서점 일을 배우기로 했다. 이제는 대학을 졸업하고 풀타임으로 서점 일을 하는데 조지는 자기가 더 일을 잘 했다고는 하지만 제레미가 말하길 실비아가 들어온 후부터 서점이 더 깔끔하고 책장은 꽉 차고 조지는 더 행복해보이는 것이 더 나아지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고 한단다. 앞으로도 파리에 가면 시간이 멈춰진 그윽한 고서점을 만날 수 있겠지.

깨끗하지는 않지만 사람들의 정이 넘치는 고서점을 운영하는 것은 정말 이상만 가지고는 이룰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런 일을 해낸 조지라는 인물은 정말 이 시대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조지이기에 “셰익스피어&컴퍼니” 가 아직까지도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조지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선뜻 서점을 맡기고 자리를 비우거나 할 정도로 사람에 대한 감각이 예리하게 발달된 인물이다. 많은 시간을 방황하며 지낸 그에게 사람을 보는 안목이 생긴 것인지는 몰라도 우리의 주인공 제레미에게도 서점에 들어온 지 하루 만에 서점 열쇠를 맡기고 다른 처리를 부탁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주인이다 보니 서점에는 도난사건이 부지기수이다. 특히 서점 주변에서 사는 노숙자들 중에는 책을 몰래 훔쳐다가 다시 조지에게 파는 뻔뻔한 사람들도 있을 정도로 난리가 아니다. 하지만 사람에 대한 애정을 듬뿍 지니고 있기에 당장 갈 곳 없는 사람들에게 서점을 선뜻 개방해놓고 음식이나 애정을 나누는 시간을 나누는 조지는 아마도 이렇게 각박한 세상에서는 꼭 필요한 가난한 천사가 아닐까 한다.

"있잖은가, 내가 항상 이곳에 대해 꿈꾸는 게 있어.

저 건너 노트르담을 보면, 이 서점이 저 교회의 별관이라는 생각이 들곤 하거든.

저곳에 맞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별관."